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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별로 20일차 삼남대로의 흔적들

청풍헌 2012. 1. 20. 23:48

나의 목표는 무었인가?

하늘을 나는 기러기,질주하는 자동차들도 가고자하는 방향과 목표가 있다.

오늘은 국도를 피하고 농로나 골목길을 갈련다.

목표를 행해 가는길이 지름길만 있는게 아니라 애둘러 돌아가는 길도 있다.

바람이 차니 정신이 맑아진다.

도로 가운데 나무가 있다.

분명 사연이 있을진데...

도로를 가로질러 명판을 확인하니 이렇게 적혀있다.

삼남대로의 흔적이다.

불과 100여년 전에는 이길로 우리의 선조들이 오르내렸다.

가다가 쉬어 가기도하고 또 소원을 빌기도 하는 옛길이다. 

삼례장날 대전 mbc에서 인터뷰한 방송에 두컷 나왔다.

혁필화가 김만석씨 인터뷰에 방송작가의 레이다에 포착되어 두컷 나왔네.

도계를 넘었다.

이곳 안성천을 넘으면 경기도 평택이다.

어찌어찌 오다보니 이곳까지 와버렸다.

경기도 입성 기념으로 안성교에서 인증샷!

농로길로 접어 들었다.

어제내린 비로 인하여 갈아놓은 논바닥의 흙냄새가 참 좋다.

골목길을 오른다.

어제보다 휠씬 운치와 안정감이 있다.

대동법시행기념비이다.

대동법이란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났다.

공납이란 지방의 특산물을 부담하는 제도인데,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납으로 부과하는 불산과세가 많았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 납부할 공물을 중간에서 관리들이 대신 납부하고 농민에게 대가를 받는 방납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방납업자들이 농민들에게 높은 대가를 요구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난 반면 국가의 수입은 감소되었다.

이에 16세기에 조광조, 이이, 유성룡 등의 관리는 공납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수미법(收米法) 등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이는 1569년(선조 3년) 임금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바쳐 건의하기도 했다.

방납의 폐해가 심하자 광해군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되고, 국가의 수입이 매우 감소된 시기에 비로소 시행되었는데,

영의정 이원익1608년(광해군 즉위년) 음력 5월에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의 폐해가 가장 큰 경기도부터 시작하여, 공물을 호(戶) 단위로 징수하던 것을 대동미, 곧 1결당 쌀 말수로 환산하여 걷었다. 이때의 세율은 봄가을 2기로 나누어 땅 1결(結)에 대해서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0말은 중앙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서 선혜청에 옮겨가고 나머지 6말은 경기청에 두어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공납으로 징수하던 수요 물품은 공인을 선정하여, 그로 하여금 구입·납부케 하고,

그 대금은 선혜청에 간직한 대동미로 지불하였다.

인조 때에는 강원도에서 실시하였으며, 효종 때인 1651년에는 김육의 주장으로 전라도충청도에서도 실시하다가 숙종함경도·평안도·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했다.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쌀 대신 (대동목)나 동전(대동전)으로 걷기도 하였다.

                                                                                                                                                           위키백과

효종2년(1651)영의정 김육이 호서 지방에 대동법이 시행되도록 상소하여 효종10년 이를 시행하게 된것을   기념한 비로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이곳 평택에 건립 되었다.

기념비 현판과 번역한 동판이다.

귀부와 이수

평택 소사벌 택지지구에서 60년대 구호를 보았다.

증산 수출 (건설) 이 세가지는 한국전쟁후에 잘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외치던 구호이다.

면사무소 기둥이나 벽면에 있던 그 글귀를 또렷이 기억한다.

수원지법 평택지청과 지원이다.

검사와 판사는 대척점에 있는데 왜 같은 공간에 있는지?업무 편의상 그런지? 

평택에서 만난 통영 굴밥집

어찌나 반가운지 굴밥을 시켜 먹었다.

집나온지 처음으로 밥같은 밥을 먹어본다.

미역국에 톳나물 두부무침 어리굴젓까지...

평택은 쌍용차의 길고도 험했던 과거를 기억한다.

분신자살과 정리해고 대모와 강제진압 등등...

아직도 그 잔재가 아물지 않고 남았다.

당시의 트라우마로 몇명이 목숨을 끊었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함께 삽시다! 라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닫는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쉬면서 사진도 찍어본다.

원균장군 묘소가는길에 만난 호박 우거리 말리는 정겨운 시골풍경.

원균장군의 사당이다.

원래 아래쪽에 있었으나 물이나고 낧아서 위에 다시 중수했다.

홍살문을 지나면 멀리 언덕에 보인다.

원균장군 묘소다.

비록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여 죽었지만 권율 이순신과 같이 선무1등공신으로 책록된 무장이다.

정치적인 입장에 의한 잣대로 평가되어 간신이라 배웠다.

그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있다.

기록이 왜 중요한지를 알수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 정치가라도 기록이 없으면 500년 1000년후에는 후세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하여 변할수도 있다.

이 원균장군의 묘소는 후손들이 근년에 성역화한 것이다.

원균장군의 묘는 초혼묘 또는 부장묘라는 설이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후 고성 춘원포에 상륙하여 전사했다.

지금도 그곳 춘원포(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 435번지)에 가면 엉구이 묘라는 묘가있다.(김일룡 통영향토사 연구논문중)

이곳에도 붕어낚시를 하는사람이 있다.

얼음이 한뼘이나 얼었다.

예쁜 흔들의자도 있고 좋은 글도 있다.

저녁에는 매화수 한병에  삼겹살을 먹었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젊은 가게에 옆 테이블에서 주민등록증 검사를 한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술을 시켜 미성년자인지 확인을 했다고 한다.

주민증을 주는사람이나 확인하는 종업원이나 자연스럽게 보인다.

삼남로!

이길을 따라왔다.

내가 왔던길이 삼남대로 였다.

곳곳에 삼남대로의 흔적이 남았다.

한국을 대표할 정치가나 젊은이들이 우리땅 우리국토 우리의 옛길을 걸으며 깊은 성찰을 했으면 한다.

정부에서도 희미하나마 남아있는 삼남대로의 흔적을 지도화하여 국토 순례단이나

필요한 사람에게 자료화 했으면 한다.

 

코스:성환-평택-오산

거리:32.18km                                                          누적거리:462.62km

시간:9h 18m                                                            누적시간:138h 29m

비용:아침 기사식당 한식부폐   6,000원                       누적경비:1,140,670원

        간식 떡 약밥 포카리 김밥 8,660원

        점심 통영굴밥 9,000원

        저녁 퇴랑 숯불 생구이 22,000원

        숙소 모텔 케슬 4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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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                90,660원

 

2012.1.20 오산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