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218회 토요갇기(남지 개비리길) 연두색 강바람에 실어 보낸 개비리길의 봄

百世淸風 2026. 4. 26. 09:27

연두색 강바람에 실어 보낸 개비리길의 봄

4월의 산하는 온통 연두색이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시야가 편안해지는 이 계절, 우리는 창녕 남지 개비리길로 정기 걷기를 떠났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난 개비리길과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 천년 고찰 관룡사와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은 단순한 산행을 넘어 역사와 전설, 그리고 사람의 온기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낙동강 변 절벽 아래 난 좁디좁은 길에는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 양아지 마을에 황 씨 집에 사는 누렁이가 새끼를 11마리 낳았는데 어미 젖이 10개라 한 마리가 경쟁에서 밀려 조리쟁이로 남았다. 건넛마을로 시집간 딸이 조리쟁이를 키웠는데 어미 개가 와서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어떻게 왔는지 살피니 낙동강 벼랑길을 타고 매일 밤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그 험한 길을 제 새끼 먹이겠다고 오갔을 어미 개의 모성애가 깃든 길, 그래서 이름도 ‘개비리길’이다. 길은 겨우 사람 둘이 엇갈려 지나갈 만큼 좁았으나, 그 굽이굽이마다 삶의 끈질긴 생명력이 흐르고 있었다.

본격적인 개비리길에 들기 전, 우리는 마분산(馬墳山) 능선을 올라 개비리길을 걷는 원점 회귀 코스로 정했다. 마분산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애마가 묻혔다는 전설과 임진왜란의 기개가 서린 이곳은 시작부터 숨이 가빴다. 작년 화왕산 산행 이후 다신 산에 안 가겠다고 선언했건만, 어느새 나는 또 산등성이를 걷고 있었다. 여섯 형제 나무와 삼 형제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지나며 바라본 건너편 산등성이는 재선충의 상흔으로 붉게 물들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우리가 누리는 이 푸르름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자연은 그렇게 아픈 몸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산행의 고단함은 양아지 휴게소에서 나눈 풍성한 성찬으로 씻어냈다. 조귀선 회원이 정성껏 쪄온 견과류 가득한 떡과 김정숙 회원이 무쳐낸 싱싱한 멍게와 채소,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웃음꽃을 피우며 나누는 이 맛이야말로 길 위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양아지 주차장을 지나 본격적으로 접어든 개비리길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오른쪽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낙동강과 왼쪽의 높은 절벽 사이, 연두색 새잎들이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이 평화로운 길이 6·25 전쟁 당시엔 나라의 존망을 다투던 최후의 방어선이었다니, 새삼 흐르는 강물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다 문득 생각나 멀리 일본에 있는 시라토 유키양과 영상 통화를 나누며, 이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을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꽃은 기다려주지 않아 수양벚꽃의 화려함과 유채꽃의 노란 물결은 조금 지나쳐 보냈지만, 서운함보다는 내년 3월의 재회를 약속하는 설렘을 남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창녕의 별미인 수구레국밥으로 허기를 채운 뒤, 우리는 관룡사로 향했다.

관룡사는 보물의 사찰이었다. 대웅전과 약사전, 그 안에 모셔진 부처님까지 고스란히 역사가 되어 우리를 맞이했다. 마지막 여정인 용선대에 올랐을 때, 하늘 아래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붕도 없이 앉아 계신 부처님을 뵈었다. 사시사철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중생을 굽어살피는 그 자비로운 시선 앞에 숙연해졌다. 한가지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그곳에서 나 역시 간절한 소원 하나를 빌어 보았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는 끝내 비밀로 남겨두었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졌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4월의 산하가 주는 평온함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조상에게 물려받아 우리가 즐기고, 또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이 아름다운 유산. 우리가 걷고 쓰레기를 줍는 이 '클린 워킹'의 발걸음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 더 맑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운을 나누었던 2026년 4월 25일의 하루는, 내 생애 가장 푸르른 연두색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