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길 이야기

제3회 통영성 걷기 <어둠을 뚫고 광명을 찾은 돌벅수>

청풍헌 2012. 11. 4. 23:50

세병관에서 돌벅수가 출토 되었다.

세병관 석축 복원작업중 기초공사를 하기 위하여 땅을 파던중에 좌측 석벽 뒤채움으로 발견 되었다.

세병관 앞뜰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던 돌벅수 4기가 두 동강난 체

지금껏 땅속에 묻혀있다 오늘에야 광명을 찾았다.

원형이 거의 살아있는 돌벅수 3기

제주 돌하루방을 닮은 벅수

두손을 공손히 앞으로 내밀었다.

왕방울 눈과 콧구멍 까지 정교한 조각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모자와 왕방울 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형상은 제주도 돌 하루방과 유사하다.

돌 하루방이 왜 이곳 세병관에 있을까?

통영과 제주도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석인도 앞의 돌하루방과 같이 두손을 앞으로 했으나 손의 표현은 없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졌으며 강한 인상을 풍긴다..

위로 치 올려진 눈섭은 무인을 상징하는듯 하다.

이 벅수는 스마일 벅수다.

빙그레 미소는  불상을 연상하는 듯

크다란 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는 뜻일게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벅수다.

 

 

이 벅수는 특이하게 두손은 앞으로 한 곳에 구멍이 있다.

구멍의 형태도 각각이다.

세 벅수의 석 재질은 비슷하나 머리가 없는 한 기는 사암이다. 

통영지(統營志)와 통영군지(統營郡誌)에는 ‘강희4년류공성추시립(康熙四年辛巳柳公星樞始立)’이란 기록이 있다.

강희 4년 숙종 27년(서기 1701년) 제76대 류성추 통제사가 처음 세웠다는 뜻이다.

석인의 조성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311년 전이다.

통영지는 통제영의 관보인데 1841년에 편찬된 저자미상의 붓글씨로 적혀있다.

통영군지는 1934년에 제작된 군지다.

 

 

돌벅수의아랫부분인데 구멍이 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연결하면 구멍이 일치 하는데 그곳에 깃발을 꽂지 않았나 생각된다.

명정고개에 있는 벅수에도 아래부분에 구멍이 있다.

세병관의 벅수와 연관이 있지않나 연구대상이다.

 

제주도는 호남이므로 이곳 통제영이 영남 호남 충청의 통합 사령부 이므로 

호남의 문화가 유입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교한 용 문양의 비석 머릿돌도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 비석은 없다.

옛 영리청의 건물인 법륜사 현판이다.

부처를 모신 곳이 통상 대웅전인데 대보전으로 쓰였다.

대보전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옆에 경진춘여사이소하(庚辰春女史李素荷)라고 적혀있다.

이 글씨를 쓴 이소하 여사는 아호가 소하인 기생으로 추정되는데 거제의 성파 하동주의 제자로서 추사체의 글씨라고 한다.

즉 추사의 제자의 제자 글씨인 샘이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의 추사체 대가로써 많은 글씨를 남겼다.

석성을 지나 토성을 올라 북포루에 왔다.

포루는 군사들이 통영성을 지키는 포루였다.

북포루의 현판은 초정 김상옥 선생의 전각이라고 한다.

북포루에서 기념사진을!

 

서포루 오르는 길에 만난 가을의 단상

돌담과 국화

아직 옛집이 그대로다.

문화동 배수지 오르는 길에 만난 통영 성곽들.

구 성곽과 신 성곽이 구별된다.

구 성곽의 돌이 더 크고 위용이 있다.

만하정 자리다.

천척루와 더불어 통영에서 경관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한다.

옛 멋진 정자는 어디가고 삭막한 콘크리트 집만 남았는고?

통제영 군점때 고관들은 이곳 만하정에서  구경하며 담소를 즐겼다고 한다.

천척루는 강구안 입구 해문의 서편 언덕에 천척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중영선소와 서파수 사이에 있었다.

통제사 이석구가 착공 및 준공했다.

 

남문터와 봉래극장터를 지나 중앙시장 분이삼색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시거문의 유구까지 보았다.시거문은 일면 수구문이라고 하며 동암문이다.

 

이만식 전 보건소 과장님의 이야기.

김세레나의 남편인 이영목이 여황산에서 색스폰 연습을 했는데

토성고개를 넘어오면 색스폰 소리가 들리고 통영 하늘에는 오색 찬란한 통영연이 날렸다.

외가가 허씨 집안인데 허장완 열사가 외조부다.

재건교회의 터가 허장완 열사의 처가터이다.

허장완 열사의 처의 인척이 법원인근과 죽림  옆에 산다.

외조부의 한분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여 독립자금을 보내주었다.

독립군의 간부 였으며 이후 김일성의 정치고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춘수의 어머님이 큰 이모님이다.

엄마와 사춘간이다.이모님이라 했다.

외 할아버지는 결혼을 했지만 거의 총각이었다. 사후 양자다.허만기옹이 허장완의 손자다.

허장완의 묘비를 대구 ymca에서 만들었다.

장례식때 이북청년단들이 와서 상여꽃을 만들었으며 동네 사람들이 광목천을 가져와서 연결해서

길이가 한일은행에서 토성고개까지 이어졌다.

허장완 열사가 집에 숨어있는데 일본순사 허00이 찾이와 장완이 친구인데 장완이 찾아왔다고 하여

아버지가 장완아 !친구왔다 하니 잡으러 온줄 눈치채고 안나갔는데 아버지가 친구 왔다하는데 왜 안 나오냐며 하여 잡혀갔다. 

 

통영성 걷기의 일환으로 세병관에서 출토된 돌벅수를 볼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라 외출을 하여 참여를 했다.

암흑의 흙속에서 광명을 찾은 돌벅수를 대하니 여러 생각이 든다.

역사는 현 관점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기록은 중요함으로 정확함이 생명이다.

통영성을 걸으며 무었을 해야하며 우리가 왜 역사를 소중히 해야함을 느낀 하루다.

 

2012.11.2.통영성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