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별로

통제사의 길1 통제사 납시오!

청풍헌 2012. 12. 16. 16:45

통제사의 길 걷기

일시:2012.12.9(일) 14시통영향교 집결

구간:통영향교-원문-고성 해미당-두룡포-통영장시-남문-세병관

 

통제사가 부임하던 길이다.

멀리 한양에서 출발하여 옛길을 따라 임지인 통영 남문을 통하여 세병관에 도착 궐폐단에서 임금님께 보고를 한다.

오늘은 그 길을 따라 옛흔적을 더듬어 본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국보 305호다.

 

김일룡 통영시향토사관장의 향토사 산책 - 1 - '광화문 현판'

세병관 현판은 이제껏 누구의 글씨인지를 몰랐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어느 날 서유대(徐有大) 제136대 통제사의 후손이 자기 집안에 전해오는 공(公)의 행적을 적은《무익공행장(武翼公行狀)》을 제시함으로써 그 실체가 비로소 밝혀졌다.

그 행장에 보면 '공이 본래 글씨를 좋아해서 당나라 송나라 및 우리나라의 금석문을 구해 조석으로 글을 썼으며, 큰 글자를 더욱 잘 써니 왜인들이 전하여 서로 보물로 여겼다... 그가 평일에 초서를 잘 안 쓴 것은 바른 마음이 해이할까 두려워함이며 매일 해서(楷書)를 몇 자씩 한정해 놓고, 혹 딴 일이 있어 쓰지 못하면 밤에 촛불을 켜놓고 그 일과를 마치었다. 말년에 더욱 부지런히 썼는데, 통영(統營)에 있을 때 많은 돈을 들여 남원설화지(南原雪花紙)를 사서 현판 서체를 몇 달 연습하고 세병관(洗兵館) 편액을 쓰서 걸어 놓으니 그의 활달하고 웅대한 글이 세병관의 위용과 잘 어울린다는 칭송이 있었으며, 그의 근면함이 이와 같았다.'(晩年益勤嘗在統營時卽捐千金購南原雪紙習額體機月乃書洗兵館額揭之雄麗稱其館其爲勤也)라고 했다.

~한산신문 기고문 옮김~

통영향교

통영은 원래 행정 구역상 고성현 춘원면 이었다.

고성향교가 민란으로 인하여 잠시 통제영으로 이설하였다가 1875년 원대복귀 했었다.

이후 고성현에서 진남군으로 분리 독립되면서 진남군 향교를 설립 하였다.(1901년)

풍화루라는 현판은 황원직의 낙관이 있는데 이는 고성 해미당 허씨 효열각에도 글씨가 있다.

 

오늘 날씨가  매우 춥다.

행사를 주관하는사람은 날씨에 민감하다.

혹시 너무추워 안오면 어쩌나등등...

그래도 18명이나 참석을 했다.

통영의 향토사를 열성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풍화루에 있는 도깨비 문양과 관찰사 이재현비, 홍살문, 하마비등이 있다.

고인돌에 대하여 견해를 밝히신다.

오랜 옛마을인 죽림부곡에 있는 유적인 고인돌인데

문화재로 지정하면 개발에 제약이 있어 어정쩡한 형태로 있다고 한다.

 

통정대부행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사적비

1886년 역병과 흉년을 규휼한 공적을 기록한 비다.

과히 기록의 달인인 만큼 가는곳마다 생기는 일마다 세세한 기록을 남겨

후세의 휼륭한 자료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채원집(茝園集)』ㆍ『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ㆍ『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ㆍ『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ㆍ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ㆍ『지도총쇄록(智島叢鎖錄)』ㆍ『여재촬요(輿載撮要)』 등이 있다.

원문성 공신루터.

마주보이는 샤시문이 원문이며 이층 슬라브 집이 공신루로 추정된다.

원문고개를 넘어 애조원쪽의 원문성 유구다.

소나무와 유자나무사이가 원문성터라고 한다.

두룡포에 통제영을 열고 미처 길이 나기전이라 이곳에서 나룻선을 타고 구루지 끄터머리(작은개)로 건너가

명정고개를 넘어 통제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북신만을 돌아서 미나리깡을 지나 고성 해미당으로 오르는 길.

고성 해미당에 있는 허씨 효열각

효열각 황원직서黃元直書

통영향교의 풍화루 현판을 쓴 사람과 같다.

 

 

 

해미당 고개마루에는 고개상회도 있다.

지금은 좁은 길이지만 옛날에는 큰 대로였다.

통영실내체육관앞이다.

북신 아파트 보이는곳 어디가 화장장 이었다고 한다.

운동장을 뒤돌아 나오니 큰 공터가 나온다.

옛 통영상고터이다.

통영동중,제일고등학교는 원문고개로 옮겨 동원중고등학교 바뀌었다.

시민 공원이나 쉼터로 두면 좋으련만 아파트를 짓는다고 한다.

비석골 새미다.

비석골 새미에 있던  도깨비는 턱이 없어 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두룡포를 설명 하시는 김일룡 소장님.

통영의 살아있는 박물관이시며 통영의 네이버 지식창고이시다.

정량동 통영관광호텔옆에 큰 바위가 있다.

가선대부삼도통제사이공응서불망비다.

이응서 통제사비는 거제 해미당 가는길에도 있다.

이응서 통제사는 선정을 배풀은 대표적인 인물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그중 邊務에 유의하여 公事에 힘을 쓴 사람은 근세에 李膺緖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므로 통영 사람들은 李某가 부임한 이후 三統使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삼통사인 蔡東健은 智將이었으며 金鍵은 威將, 申檍은 福將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응서를 따를 수 없었다. 이응서는 그 후 70세의 나이로 다시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철종 말년이었다. 이때 그는 성곽을 쌓고 선박을 보수하는가 하면 총과 포를 제조하고 소금과 땔감을 저장하여,

흡사 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았고 늠름하게 적과 대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봉급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사직하고 돌아올 때도 그는 손에 채찍 하나만 들고 왔으므로

그곳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채동건이 하루는 戰船을 검열하다가 한 艙板을 가리키며 “이 나무 속에는 좀이 들어 있으므로 바꾸라”고 하였다. 톱으로 베어 보니 과연 나무가 썩고 벌레가 먹었으므로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神術을 가지고 있는가 싶어 그를 두려워하였다.

 

덤바우는 흔적도 없고 덤바우 식당 간판만 이곳이 덤바우가 이었던 곳임을 증명한다.

덤바우에는 김영 통제사의 각암비문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순조 29년(1829) 이곳에 큰 불이 나 지금의 동호동 일대와 정량동 일부까지의 민가 수백 호를 태운 일이 있었다.

이때 김영 통제사가 이 바위에 올라 지팡이를 들고 수일 동안 군민(軍民)의 진화작업을 지휘하였다.

그후 공(公)은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도록 허락하여 부락민들에게 새 가옥을 짓게 하였다.

그 다음 해 김영 통제사는 봉금구역의 산림보호 규칙을 어기고 소나무를 벌채하였다 하여 통제사직에서 파직되었으며,

그 해(1830년) 동민들은 공의 은덕을 기려 이 바위에 공덕문을 새겼다 전한다.

 

그러나 그 귀중한 유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제사 납시오!

멀고먼 한양길을 나선지 여러날 만에 통제영에 도착했다.

 

중군은 갑주를 입고 관하의 병사들을 거느려 진을 쳤고,앞에 모시는 사람이 나아갈 수 없고 개문의 절차를 상세히 다할 수가 없게되자 

집사가 명령을 받들어 중군이 대포를 놓기 무릇 네차례를 한 뒤에 통사의 앞에서 부터 한 소리 응답의 대포가 있었다.

차차 전진하고 중군은 진을 철수하여 선봉이 되어 행진 하였다.또 남문 밖에는 한 백포의 장막을 설치했고 통사가 바로 들어가

좌한뒤에 장막의 남해 위에는 6척의 전선이 있는데 하나는 중군의 배요 다섯은 각 진영의 배이다.

그 밖에 따르는 배가 수십척인데 각기 지위에 차례를 베풀어 결진 했으며

깃발이 서고 북소리와 함성이 울리고 방포의 상응 하기가 무릇 세차례였다.

 

(중략) 

 

통사가 바로 세병관에 들어가 하례를 드린뒤 청 위에 개좌하여  

중군이하 장관과 장교와 관리이하 군사들의 군례를 받은뒤에 곧 운주당으로 들어 가셨다. 

밤에는 사처에 잤는데 학 아이와 극과 시는 각 숙소로 돌아갔다.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지 아니하여 입으로 시 한수를 지었다.

 

~함안 총쇄록에서~

 

위의 글은 오횡묵의 함안 총쇄록중 통제사 부임장면을 기록한 부분이다.

짭은 구간이지만 통영향교에서 원문을 지나 해미당 두룡포를 지나 남문을 거쳐 세병관까지 왔다.

세병관을 중심으로 훌륭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통영이 문화의 중심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12.12.9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