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4

청풍헌 2014. 4. 19. 00:07

오늘은 네번째시간이다. 

향토역사관에 모여 통영성 지도를 보며 지명에 대하여 몇가지 설명을 하셨다.

남망산 입구는 항목이다.項목덜미 항으로 목이다. 목을 중심으로 항의 북쪽이 항북동이며 동피랑 아래 소나무밭이 해송징이다. 송정이란 지명을 정자와는 상관없다. 亭은 정자와 상관없는 지명을 이야기 한다. 거제 귀목정, 서송정 등등이 있으며 던바우골, 애액골,혹은 와곡(기와 굽던곳)이있다. 진남군 시절 이곳을 정동貞洞이라 했는데 정동과 면량동이 합하여 정량동으로 변했다. 세병관 아래를 내려오다 하마비를 보며 한소리 하신다. 없던 하마비를 세웠으면 재대로 세워야 하거늘 방향이 틀렸다. 벅수가 서 있는 방향이 바른 방향인데 이것을 돌려  세워 놓았다. 통제사이하배하마비統制使以下背下馬碑즉 통제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라는 말인데 여기에 비를 넣어야 할까? 의문을 제기 하신다. 벅수앞의 제단에 있는 글씨는 판행, 화주, 석수인데 이는 실명제로 누가 이 벅수를 만들었는지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스님들은 성벽을 잘 쌓았다. 숭유 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에게 힘든 일을 많이시켜 오히려 승려들이 기술이 좋았다. 또한 종이 만드는 일도 승려가 했다. 윤천뢰 통제사때 승려들이 통영성을 쌓고 그 공로로 용화사를 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통영성의 성장과 용화사를 같이 관리 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종이를 많이 만들었는데 안정사 입구의 지석골 식당이 지소골이다. 紙所지소라는 말은 종이를 만드는 장소로 원문에 지창이 있어 여기에 모아서 통제영에 사용했다. 당시 승려들은 매우 천대를 받았다.  말이 승려이지 중놈이라고 했다. 


이곳 갈림길이 큰 네거리다. 서문으로 가는 길과 동문으로 가는길 북문으로 가는길과 남문으로 나가는 길이 만나는 사거리다. 이곳 아래가 유명한 천일갈비가 있었다. 이곳 주위가 법원 검찰청이 있어 이곳이 통영 시내에서 가장 비싼 음식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기억했다. 맞은편이 통영경찰서다. 이곳을 지을때 거금을 희사한 김덕보 여사는 통영의 갑부였다. 통영중학교 부지도 희사 했으며  현 싯가로는 몇십억 정도의 돈을 기부하여 경찰서를 짓는다. 해방이후 혼란기에 미 군정이 들어오기전 통영 경찰서는 일본 군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있었다. 이양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만주에서 생활할때 권총과 엽총을 가져와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일본 군인이 경찰서 2층에 기관총을 세워놓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이때 이양도가 군인들에게 시비를 걸었는데(너희들 망했는데 왜 일본으로 가지 않고 버티느냐?) 화가난 이양도가 집에서 엽총을 가져와 공포탄을 쏘았다. 이 소리에 깜짝놀라 비상이 걸렸는데 이때 봉래극장 기도였던 임정복이 경찰서 후문의 상무관으로 가는 담을 뛰어 넘어 가다 일경에 발각되어 착검을 한 장검에 배가 찔러 비틀었는데  창자기 튀어 나와 죽었다. 그때의 사진이 여러장 있다. 이 사건으로 향경대가 경찰서를 습격하여 시신을 내어 놓으라 하여 협상을 벌여 시신을  인도하고 통영 최초의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경찰은 감옥에 넣고 일본 민간인들은 본원사 신사에 가두었다. 


류치환 생가터에 왔다. 이곳이 유치환의 생가터인가? 류치환의 족보를 보면 부친 류준수는 신흥동에서 1911년 이곳 동부동으로 이사를 왔다. 류치환이 1908년생이니 신흥동에서 태어나 3살때 이곳으 로 이사를 오게된 것이다. 그러면 류치환의 생가는 신흥동이 되는게 이치다. 신흥동은 현 충무고등학교 아래인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이곳에서 500번지로 이사를 간다. 새마을 금고 있던 곳이 삼일만세운동을 한 기생들의 권번이라 하는데 이는 틀린것이다.  이곳은 1930년대에 존재하던 권번이다. 삼일운동 당시의 권번은 항남동에 있었다.  청마가 다시 이사온 집은 길이 나면서 이리저리 짤리고 짜투리 땅만 남아 있다. 골목으로 계속 오르면 새미가 나오는데 통영성 3지9정중 동문안새미, 즉 동문내로변정이다. 이곳의 새미는 지금도 허드렛물을 사용하는 두레박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유명한 통영의 화가가 당시 6.25때 피난민중 에쁜 아주머니 한분이 이곳에서 삭바느질을 하며 살았는데 그 화가가 들락거렸다. 이후 그 아주머니는 인천으로 살러가고 아들을 낳아 우리나라 유명한 기수가 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를 주선 했으나 아들이 거부 하여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당시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 거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은 김용주 생가터다. 김용주는 통영여중 선생을 했으며 이후 명성 레코드뒤 향원 요정집위 기와집에 살았다, 탄생 100주면 기념으로 화비를 세웠는데 대표작이 투계 혹은 방위다. 방위는 암닭이 모이를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수닭이 지켜주는 형상으로 암울한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하는 의미라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것이다. 당시 김용주 같은 지주의 아들은 마작, 투계, 노름등을 했으며 아마 투계를 생각하며그리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씀 하셨다. 주전동정에 왔다. 공사할 때 불도저로 밀고있는 것을 향토사 공부를 한 시민의 제보로 달려오니 아니나 다를까 밀고 있어 잠시 중단을 시키고 보존 하도록 한것이 지금 남아있는 주전동정이다. 


김용식,김용익 기념관에 도착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용식,용익 형재가 살던곳(혹은 생가터) 했으면 좋았을 것을... 부친 김채호는 광도면장을 역임하고 광도면 용호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세칸짜리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김용식의 '새벽의 약속'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용식,용익형제는 1995년 같은해 돌아가셨다. 초가집에서 6~70년대는 기와집이었다가 지금의 현대식 집의로 지은것은 1990년대이다. 김채호의 동생이 유명한 독립운동가다. 동생 김철호는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갖혔던 분인데  6.25때 좌익으로 몰려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도 다시 조명해야 할 부분이 많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다. 내가 들을 것만도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명정동 올라 가느곳  도독골에서 총살을 하고 무더기로 묻었다는 이야기, 욕지가는 동일호에 굴비처럼 묶여 수장시킨 이야기를 들었다. 김용익의 대표 단편은 꽃신인데 유럽의 교과서에 실린 단편은 해녀다. 이를 잘못 알고 꽃신이 실렸다고 이야기 한다. 김용익의 소설은 영어로 쓰여 한글로 번역된 것이다. 이 일대가 대나무가 많아 대몽지라 했으며 담뱃대를 만드는 장인도 있었으며 가죽을 다듬는 사람,  꽃신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달동네였다. 말이 꽃신이지 당시에는 깔신, 갖신, 가죽신이라 했으며 가죽신 위에 꽃 수를 놓아서 꽃신이라 했다. 꽃신의 내용은 백정의 아들 상도가 꽃신집 딸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통영의 가장  전통적인 언어와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동문고개는 동문이 있던 자리인데 춘생문이라고 하며  성안과 밖으로 길이 있어 성안길 , 성밖길 했다. 조금 내려오면 큰 집에 있는데 이 집은 조흥금고 사장집이라고 한다. 그 옆이 김삼주의 집이라고 하니 통영의 착량교를 놓고 견내량 도선을 무료로 지어준 대표적인 거부다. 또한 더 안쪽에는 임철규씨 집이었는데 임철규는 통영청년단화관을 건립때 회장을 하신분으로 집안의 문중 재산을 저당 잡혀 곤혹을 치르다 자살했다. 동문고개를 넘어오면  작은 고랑이 있다 이 고랑에서 동네 아낙이 서답을 하고 있는데 고개를 드니 하늘과 키가 맞닿은 마구할미가 치마에 금은 보화를 가득담고 바다를 건너 오길레 깜짝 놀라 방망이를 가르키며 저기 마구할매온다 하고 외치니 놀란 마구 할매는 금은 보화를 놓쳐 남망산과 장자섬이 되고 안뒤산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일본놈들이 냄새를 맞고 남망산과 장자섬의 금은 보화를 을 케내 이 동네가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이야기를 기고 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던바우골은 바위가 바닷가에 파도에 부식되어 떠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곳에 큰 바위에 통제사 김영 각암비가 있었는데 도로공사를 하면서 파괴해 버려 흔적도 없이사라졌다. 김영 통제사는 재임시 이 일대 송정, 해송정, 애액골, 와동등에  큰 불이나 큰 바위 위에서 진두지휘하여 진화작업을 하고 이후 겨울이 다가와 백성들이 얼어죽을 까봐 금송구역의 소나무을 베어 집을 짓게 했는데 이듬해 파직을 당했다. 금송구역은 어떠한 이유로도 소나무를 벨 수 없도록 국법으로 엄격히 관리된 구역인데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본인이 책임을 지고 백성을 살리는 마음으로 행했던 것인데 처벌를 받아 그가  떠난후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세겼는데 후세의 우리들은 그를 기리지는 못할 지언정 그 흔적마져 지워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가 떠날때 원문고개까지 전송을 하며 아쉬워 했다. 사라진이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우자. 그래서 후세의 정치가들의 귀감으로 삼자. 던바우 식당이라는 상호와 길 이름만 남았다. 


정량동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 남망산 쪽이 보인다.  동호식당과 나폴리 주유소 사이가 좁은 항목이었다  저곳에 통영고등학교가 있었으며 이후 수산학교로 바뀌었고 둔덕으로 오가는 뱃머리였다. 거제 둔덕은 그 만큼 가까웟다. 김춘수 생가에 왔다. 김춘수 생가는 서울 사람이 미리 선점을 하여 고가를 요구하여 매입을 못하고 있다. 김춘수는 통영의 대표 시인이다. 이런  멋진 시인을  항남동 자투리땅에 동상을 세웠는데 적십자 병원에 약타러 가는 영감으로 만들었다.  한국 현대시 100주년 10대 시인으로 뽑힐 만큼 유능한 시인이다. 이 중에 통영에 관한 시인이 세분이나 있다. 김춘수는 통영사람이고 백석은 박경련을 사랑하여 통영이라는 시를 세편이나 남겻으며 정지용 시인도 통영을 와서 시를 남겼다. 당시 집 앞에는 방앗간이 있었으며 큰 기와집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호떡집에서 호떡을 사 남망산 공원 입구 꽃 시비앞에 모였다. 간식을 나누어 먹고 독립투사 허장완의 생가터에 대하여 이만식님은 남망산 공원 입구라고 증언 하신다. 기실 실제는 도천동에 표석이 있는데 그곳이 아니란다. 여기 이곳이며 송병원씨 집이었고 큰 기와집이었다. 허씨 본가는 도리골 이라고 한다. 여기서 통영 삼열사중 이학이와 이학 으로 이름을 두개 쓰고 있는데 어느것이 맞는지 물어보니 두개가 다 맞다고 하신다. 이는 큰 시빗거리가 못된다. 꽃 시비에 대하여  비판이 있었다. 본래 이 시비는 초정 선생의 생가터 앞에 세워졌는데 어디 선배의 집앞에 후배의 시비를 세우느냐 하여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런데 꽃 시비의 글귀가 사진 액자처럼 생겨 두인頭印이 글짜보다 올라가 이건 잘못 되었다. 두인은 겸손의 미덕이 있어 글자보다 약간 내려서 찍는게 정석이다. 또 뒷면에는 통영보통학교의 학력이 없다. 경기 고등학교의 학력은 있는데 왜 통영 보통학교의 학력을 뺏는지 이는 통영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한다.  


남망산 공원길을 오르며 이태규 유작전을 언제 하는지 물어보니 5월 2일 한다고 했다.  김약국의 딸들 촬영 표지석에 왔다. 당시 표지석을 세울때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야 진정한 가치가 있을건데 이런 구석에 세워 보는 사람도 없이 처박혀 있다. 이곳이 남송정이 있던 활터다. 김약국의 딸들의 한돌과 용남이 뒹굴던 장소가 이곳이 아니던가? 초정시비에 왔다. 초정선생의 시비는 후원회에서 건의하여 1억5천만원의 경비로 세웠는데 당초 회관입구 아래로 지정 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너무 구석이라 찾는 사람이 드물것 같이 안타깝다고 했다. 조각공원을 가로질러 열무정에 입구에 왔다. 열무정閱武亭은 본래 군사들의 사열을 받는 정자를 말 하는데 사대射臺와는 다른 뜻이다. 이는 남송정이 흘리고 나서 다시 지으며 이름만 열무정이라고 따왔다. 이 글씨는 이순필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남망산 공원의 이순신 동상에 왔다. 통영의 정신적 지주인 이순신 동상에 참배를 하고 이 동상에 차고있는 칼은 의장용이며 중국 갑옷의 비늘이 있으며 전쟁이 한창인 1952년 제작하여 1953년도 세웠다고 한다. 당시 소장님께서는 이 동상을 만드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하신다. 김경승이 제작 했는데 당시 군청(현 박물관)앞 농협 창고에서 두개를 만들었는데 한개는 부산 용두산 공원에 세웠다고 한다,. 형태는 통영에 세운 동상과 약간 틀렸다고 기억 하신다. 어릴적 별 걸  다 보고 기억 하신것은 이런 일을 하라는 뜻인가 생각한다. 동상의 전면에 쓰인 충무공이순신忠武公李舜臣이라는 글씨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수향정이라는 정자가 한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水鄕亭이란 중국에서는 조용한 시골 바닷가를 뜻하는 말인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름이다. 또한 한산대첩비를 그렇게 고졸하게 잘 세겨진 글씨의 비석을 착량묘로 옮기고 엉터리 조잡하게 세워 놓았다고 했다. 좀더 내려오면 충무공 시비가 있는데 이 글씨는 초정 김상옥 선생이 20대에 쓴 글씨라 한다. 20대의 글씨가 이 정도면 얼마나 글씨를 잘 썻는지 알 만하다. 


통영의 최초 서양화가 김용주 화비에 왔다. 대표작 방위는 해석이 잘못 되었다. 이 화비가 세워진 장소가 유치진 선생의 흉상이 세워졌던 장소인데 새까만 후배가 감히 이곳에 화비를 세울 수 있나 하며 이는 한참 잘못된 것다. 선배를 선배로써 대접해야 하는게 통영의 전통이며 도리다. 이곳이 유치진의 흉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연극을 이야기 할때 류치진을 빼고 어떻게 연극을 말할 수 있는가?  친일이라는 미명으로 강제 철거되어 아픔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인데 감히 새까만 후배의 화비를 세우다니... 이런 경우가 없다고 하신다. 


3시간 동안의 열강을 하신 소장님은 향토 역사학에 통달 하시니 자연스럽게 이치가 보이는것 같다. 

지명이며, 고고학적 가치며, 문화사적인 가치를 알아 보시는 탁견을 지니셨다.

다음시간은 통영성을 걷는다고 한다. 

통영성 기대가 된다.


2014. 4.15 동문-주전골-정량동-동호동-남망산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김용익 선생의 친필 꽃신

▲통제사이하배하마비?

▲벅수를 제작한 실명제를 설명 하신다.

▲해방후 통영경찰서 접수사건을 설명하신다.

▲청마의 생가터에서

▲해방직후 통영경찰서 사진

▲청마 부친 류준수의 호적등본에는 1911년 신흥동에서 태평동 500번지로 온다

▲이곳은 1930년대 권번자리

▲류약국 사람들

▲사진

▲집앞에서 찍은 인증샷

▲태평동 500번지

▲하동문로변정

▲주전동정

▲김용식,용익 가족 사진

▲친필 서명된 꽃신

▲김삼주 집이 있던곳

▲이곳 작은 고랑에서 마구할멈 이야기가 태어나다

▲바위골

▲던바우가 있던 장소

▲식당 간판

▲이 골목 왼쪽은 바다였으며 둔덕 뱃머리와 통고가 있었다.

▲김춘수 생가터

▲동피랑 호떡 300원 와~ 싸다

▲쌈지 공원에 세운 김춘수 시비

▲남망산 공원

▲영화 촬영장소

▲초정 시비

▲초정 선생을 살피고 계신 소장님

▲무얼 그리 열심히 보시는가?

▲열무정

▲남망산 공원의 이순신장군 동상

▲수향정(鄕에 대하여 잘못된 작명이라고 한다)

▲왜 전에 있던 대첩비를 옮겼을까???

▲충무공시비(초정 선생의 글씨)

▲김용주 화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