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5 (통영성)

청풍헌 2014. 4. 25. 22:21

통영은 마법같은 도시이며 양파 껍질 같이 벗기면 벗길수록 새로운 속살이 나오는 듯하여 신비롭기도 하거니와 항상 새로운 느낌을 주는 소장님의 이 향토사 강좌는 통영을 알아 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며 교육이고 향토사의 골육이 되는  엑기스이다. 오늘은 그 다섯번째 시간으로 통영성을 걸으며 여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내셨다. 통영성은 통영지統營志 성지城池편에 기록되어 있다. 강희 17년(1678)에 윤천뢰 제57대 통제사가 처음 쌓았다. 산성의 둘레는 7리, 성가퀴가 707타, 자로 총 11,730자, 높이 1장반, 도보로는 총 2,346보이다. 세개의 연못이 있으며 9개의 우물이 있고 미나리밭이 있으며 4대문과 2암문 3포루가 있다. 제대로 규격을 갖추어진 수군 관방을 총괄하는 통영성이 견고하게 축성 되었고 관리 되었다. 허나 1895년 폐영된 후 이리저리 헐리고 뜯기어 눈에 보이는 체성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초석과 일부 흔적만 남아있다. 오늘도 그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본다. 통영 문화원에 모여 어르신 취미활동의 일환으로 통영성길 걷기 사업을 같이 수행 함으로 몇가지 일을 하고 역사관에 왔다. 향토 역사관은 통영을 알아가는 출발지이며 각종 자료가 전시된 곳이다. 답은 현장에 있다는 명제 아래 향토역사관에서 약간의 설명을 한후 운주당 아랫길로 나섰다. 이길은 통제사 관리들이 지나 다니던 길로 통영성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 길이다. 운주당 아래길 초입에는 큰 고목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고목나무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하시며 풀어 내셨다. 여기에 있던 고목나무는 오랜 세월에 가운데가 썩어 큰 구멍이 있었다. 이 고목나무와 세병관 우측의 큰 고목나무가 밤마다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고목나무는 음이며 세병관 옆의 고목나무는 양이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당연한 이치 이거늘 두 나무가 연애를 한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회상 하신다. 골목길은 견치석으로 쌓여져 일제 시대의 석축 방식이라 하며 돌은 개의 이빨처럼 끝이 뽀쪽하다. 조선의 석축은 막돌을 위 아래로 편편히 눞혀 쌓은 방식이다. 돌담에 회칠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 세병관 지붕위의 하얀 회칠에 대하여 격조 높은 집에 만 칠 하는 회는 조개 껍데기를 부쉬어 만들며 이를 양성이라 한다. 임금이 계시는 궁궐이나 격이 높은 건물에만 양성을 했다고 한다. 길 아래에 있는 법륜사는 영리청의 건물로 세병관과 괘를 같이하는 연륜을 가진 건물이다. 영리청 지붕위의 기와는 고색창연하고 일부는 허물어졌다. 지붕위를 유심히 실펴보니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며 저 기와가 그때의 기와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법륜사에 들아가니 대보전 현판에 대하여 경진춘여사이소하慶辰春女史李素荷라는 여느 기생의 글씨이며 추사체를 잘 쓴 성파 하동주의 제자라 추론 하셨다. 성파 하동주는 거제 사람으로 말년에는 진주에서 기거를 했으며 일설에는 추사가 제주로 귀양가기전에 거제도에서 성파 하동주의 부친과 교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는 낭설로 밝혀졌다. 아마 추사의 문집을 구해주어 피나는 노력으로 추사의 글씨를 잘 쓰지 않았나 생각되며 용화사, 옥천사, 촉석루 등등에 성파의 글씨가 남아있다. 이 대보전大寶殿 이라는 현판도 하동주의 글씨와 유사하여 그렇게 추론 한다.  새미!  한때 민방위 시설을 하며 통영의 모든 새미에 양수기를 설치하고 우물을  파손했다. 九井  一在鑄錢洞  一在下東門路邊  一在東樂路邊  一在東部路變  一在南門內人家中  一在新上池邊  一在西舊上路邊  二在北門內路邊 중 신상지변정 이다. 이 우물은 왠만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수량이 풍부했다고 기억한다. 4차선 도로를 확장하며 헐린걸로 기억 되는데 소장님은 이 우물은 길과 무관한데 헐렸다고 한다. 우물 하니 지난번 큐슈 역사 탐방때 구마모토성내의 우물 생각이 절실하다.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시 선봉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가 정유재란시 울산성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말의 피를 마시며 연명을 했는데 우물의 중요성을 알고 많은 우물 팠는데 남아 있는 우물을 철망으로 덮어 숨을 쉬게 하고 있었다. 두개의 북문 안새미중 하니는 유실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하나도 스텐으로 뚜껑을 덮어 숨도 못쉬게 막아 놓았다. 우물 옆면에 김덕보 여사가 우물을 중건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글귀도 엎드려야 볼 수 있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부족함을 느꼈다. 이것도 아이디어인데 그래도 좀 조언을 얻어 했으면 한다. 지난번 진주성내에도 우물을 복원 했었는데 그곳의 우물도 철망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안전과 호흡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것을 보았다. 어르신들의 점심인 충무김밥을 담은  아이스 박스를 들었는데 북문지 까지 갈 수 없어 북포루로 곧장  올랐다. 북포루에서 보는 통영시내의 전망은 탁월하다. 북포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도식락을 각자 싸가지고 와서 먹었다. 옆자리에 송국장이 계셔 도시락에 머위로 싼 쌈밥이 있어 맛을 보았는데 와! 기찬 음식이다. 머위의 쓴맛과 아싹한 맛이 어우러지고 안에는 무었이 들었는지 아싹 씹히는 맛이 머위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느꼈다. 북포루의 현판은 김상옥 선생의 글이라고 한다. 글씨체가 미륵산의 화기를 생각하며 쓴 글씨라 해석하며 작은것 하나도 주변 환경과 여건을 생각하며 조화로운 글씨를 쓰셨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데 김국장이 양손에 쓰레기를 들고 내려온다. 그걸 그냥 볼 수 없어 내가 또 쓰레기까지 들고 내려왔다. 내가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면 누군가가 수월해 질 것이다. 서문고개를 넘어서 귀중한 자료를 보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동 배수지 첨탑의 원형 사진을 보았다. 드디어 천록영창天祿永昌이라는 글귀를 처음 보았다. 천록영창 때문에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실제 사진은 처음 보았다. 역시 소장님은 통영의 네이버 지식인 이시다. 첨탑위의 뽀쪽 솟은 것도 그대로 이며 글귀도 그대로다. 지금은 첨탑위의 뽀쪽한 탑도 부서졌으며 글귀는 시멘트로 발라버려 무슨 글귀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문화동 배수지는 당초 뚝시당이 있었으며 이후 운동장 백호정 배수지로 변천했다. 서포루에서 휴식을 취하고 창동으로 내려왔다. 골목길... 만하정 자리 못미쳐 남암문이 있었다 이 문은 항시 잠가 두었는데 미륵산의 화기를 다스리는 의미로 잠가 두었다고 한다. 통영에는 불이나면 항상 쌍불이 난다는 속설이 있다. 몇일전에도 불이 났는데 두번 연속으로 화재가 났다고 한다. 만하정은 천척루와 쌍벽을 이루는 전망을 자랑하는 정자다.  만하정은 만하세병에서 따왔으며 세병관 이름도 비슷하다. 조금 내려오면 비둘기상이 있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 사진을  보여 주신다. 흑주교회가 있던 자리라고 하신다. 흑주교회? 그 사진에는 통영문화협회 사진과 함께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 하나하나 설명 하시며 통영의 문화운동을 한  당대의 주역이 들어 있다고 하신다. 100여년전 통영을 사랑하고 통영을 위한 사람들이 모여 찍은 곳에서 우리도 사진을 찍자고 하여 같이 사진을 찍었다. 100년후 후손들이 통영 향토사를 공부하며 이 사진을 들고 오늘 처럼 이야기 할지 모른다며... 남문으로 내려왔다. 남문복원이 통제영 복원의 방점을 찍을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사진이 있으니 초석을 잘 발굴하여  멋지게 복원하면 그나마 체면치래는 될 것이다. 중앙시장을 거쳐 동피랑에 올랐다. 동암문 올라가는 곳의 일본절 도리이 기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가 그 가치를 알고 치웠는지 아니면 그냥 부쉬었는지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사라졌다.  동파랑에 올라 소장님의 주머니를 털어 아이스크림을 한개씩 먹고 동포루에서 일정을 마쳤다.


2014.4.22 통영성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영리청 건물 지붕

▲대보전 현판(이소하 )

▲관아 건물임을 증명하는 둥근 기둥

▲신상지변정

▲북문내로변정

▲북문내로변정

▲위:신상지변, 아래:북문내로변정


▲배수지 사진


▲현 배수지 모습

▲남암문 자리

▲만하정 있던곳

▲흑주교회 전도관

▲흑주교회 전도관 사진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