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강좌6 통제영지

청풍헌 2014. 5. 2. 20:52

제6강은 통제영지에 있는 각종 관아館衙에 대한 공부다. 통제영지가 사적지로 지정된 후 20여년에 걸쳐 복원한 통제영지의 건물을 둘러 보고 역할과 뜻을 살펴보기로 했다. 복원하는데 마음에 차지 않으셔 문화재청을 나무라기로 했다. 역사관에 모여 인사를 나눈 후 지도앞에 섰다. 지도에서 개관을 설명 하시고 중영자리가 고성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1872년 봄에 그려진 지도로 확정되며 당시 고성에서 호적 분규가 일어나 탈세 및 균역을 면피하기 위하여 여러 일들이 발생한다. 즉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라 사회가 어지러운 시기였다. 고성 현청이 위기를 느끼고 통제영 관할로 들어 오는데 당시에 향교도 같이 들어왔다. 원래 향교는 고성현에만 있었는데 현청이 이곳으로 오며서 향교도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민란이 안정 된 후 고성현청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향교도 옮겨가게 되었다. 지도에 이는 세병관, 운주당, 백화당, 공고, 중영, 포수청등 대략적인 위치와 설명을 하시고 중영으로 이동했다. 역사관을 나와 수항루에 앞에 섰다. 누문이나 누각, 관아건물의 현판 글씨는 해서체로 쓴다. 너무 두껍지 않게 적당한 크기로 조화롭게 쓰야하며 원래 낙관을 쓰지 않는다. 이유는 겸손의 의미가 있다. 수항루의 현판은 백헌 이정규님의 글씨이며 무난한 글씨라고 평 하셨다. 수항루는 선소 입구에 있는 누문인데 수항루와 선소문이라는 현판이 있어야 마땅한 이치다.  중영으로 이동했다. 중영은 통제사 휘하 우후가 근무하는 곳으로 우후는 통제사 막하 직급인데 경상우수영의 역할을 담당한 막강한 권한이 있는 자리다. 삼도를 통괄하는 통제사와 실질적인 경상우수사 역할을 한 우후는 중영에서 근무를 했으며 독립적인 군막과 선소, 포수청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기는 1년반이다. 통제사의 임기와는 맞지 않아 약간의 엇박자가 생길때도 있었다. 중영 입구의 표미기는 표범을 상징하는 깃발로 깃봉이 뽀쪽한 삼지창이 아니라 둥근 술모양이라고 한다. 또한 큰 호랑이가 세겨진 영문 깃발을 달면 훨씬 멋질것인데 하는 의견이다. 삼도대중군아문三道大中軍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삼문을 들어서면 중영청이 마주 보인다. 중영청 좌우로 행랑이 있으며 외삼문 옆에도 부속채가 있어 숙소로 쓰였다. 중영청의 우측에는 응수현이 있는데 우후의 접견실이다. 이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듣고 처리한다는 뜻으로 당시에도 서로 소통을 강조한 이름을 사용했으며 별체로 결승당이 있다. 망일루望日樓의  日이 임금을 상징하는 뜻으로 임금님을 우러러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곳이 종루를 겸한 세병관 외삼문인데 복원당시 강력하게 항의했었지만 그것을 고려하지 않아 지금은 종을 세울 수도 없다고 당시를 회고 하신다. 망일루의 기초석 돌기둥에 대해서도 당시 사진에는 충렬사의 강항루 초석 정도의 높이인데 내 키만큼 키웠다고한다. 망일루는 인정(저녁10시경)과 파루(새벽4시경)에 종을 쳐 사대문을 열고 닫는 신호역할을 한 종루이다. 산성청의 현판은 도깨비 같은 글씨다. 산성청은 통영성을 방비하는 산성중군의 관아이다. 좌청은 출동을 대비하여 기다리는 5분대기조 역할을 한 군막이다. 좌우청을 지나면 지과문이 보인다. 지과문으로 들어서는 계단은 너무 가팔라 관광객이오르내리기가 위험하다. 지과문은 중요 행사시에만 오르내리고 일반 병사들은 협문으로 통과 했다. 세병관 옛지도에는 좌측에 협문과 내아로 가는 홍예문이 있다. 두룡포기사비는 통제영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비로 원래 선소앞 수항루 우측 언덕에 있던 것을 세병관 경내로 옮겼다가 이곳에 비각을 짓고 옮겻다고 한다. 그런데 안내판에 비대가 없다고 하는데 나무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왜 발굴하지 않을까 궁금할 뿐... 두룡포기사비의 이수에는 용 두마리기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며 이는요이 될려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한다. 통상 비석은 윗부분 부터 개석,비신,대좌라고 한다. 개석은 이무기를 뜻하는 용을 세겼으면 이수라하며 기와지붕 모양은 가첨석, 옥개석이라 하고 꽃잎 문양만 있으며 관석,화관석이라 한다. 대좌는 비신의 받침대인데 거북이 형상이면 귀부이고 네모이면 방부,농대라 한다. 세병관은 언제보아도 웅장하다. 세병관은 두보의 시 <마행세병> 안득장사만천하 정세갑병불용에서 왔으며 어찌하면 장수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어 영원토록 쓰지 않을꼬? 라는 말이다. 즉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은 뜻이다. 이 글씨는 서유대 통제사의 무익공행장에서 밝혀졌다. 전폐단, 궐폐단이 있는데 전폐단은 교의 위에 전殿자를 세우고 임금님이라 생각하고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전폐단과 궐폐단의 차이는???


궐패와 전패의 차이점은 ?

궐패는 중국의 황제를 지칭하는 "궐"闕(대궐궐)를 나무에 돋을 세김으로 세겨서 궁궐에 모시고 예를 표했던 사대주의의 산물이다.

즉 황제를 상징하는 패인데 살아있는 황제를 모시는 형상이므로 대궐의 정전에 모시고 임금이 배례를 했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세겨 모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했다.(전하!)

조선시대는 강력한 왕권의 시대였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패 였다고 한다.

통상 궐패는 임금이 계신 대궐의 정전에 모셨으며 지방 객사에는 전패를 모셔 임금을 대하듯 하였다.

대한제국을 선언한 고종 이후에는 황제국이므로 전패를 치우고 궐패를 모시도록 했다.

고종 34권, 33년(1896 병신 / 대한 건양(建陽) 1년) 8월 15일(양력) 1번째기사
지방의 각 부·목·군의 ‘전패’를 ‘궐패’로 고쳐 부르는 데에 관한 안건 등을 모두 반포하다.

 

전패가 매우 위험한 이유는?(전패의 변)

지방 수령들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선정을 배풀기도 하지만 탐관오리들도 있었다.

탐관오리들을 골탕 먹이기 위하여 전패를 훼손하여 그 내용이 중앙에 알려지면 파직되고 지방이 강등 되거나 심지어  현이 폐현 되기도 했다.

즉 임금이나 황제를 능멸하는것이라 생각하여 매우 언격하게 관리되었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정조 34권, 16년(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월 7일(정축) 1번째기사     
            
충청도 오영장(五營將)을 삭탈 관직하고 엄히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직산현(稷山縣)의 전패(殿牌)를 도적질한 죄인을 기한이 다 되도록 잡지 못했다는 전 도백(道伯) 박종악(朴宗岳)의 장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병관 좌측 위쪽에 전경소라는 시간을 측정하는 건물이 있었다. 이곳의 물시계를 보고 시각을 정하여 망일루에서 타종 했다. 세병관을 오르는 섬돌이 원래는 세개다. 또한 세병관 우측에도 섬돌 계단이 있었다. 세병관 기둥은 50개인데 바깥기둥은 비바람에 썩어 갈아 끼웠으며 안쪽 기둥도 원래 기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완전 해체 수리를 했기 때문에 100%라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학교로 사용 하면서 기둥에 구멍을 뚫고 칸막이를 한 흔적은 있다. 경내에는 좌우로 행랑이 있었는데 동쪽 행랑이 괘검루, 서쪽 행랑이 괘궁정이다. 내회소와 외회소가 있었으며 동서 행랑채 앞에는 품계석이 있었다. 신설된 기삽석통에는 수자기가 펄럭인다. 이번 석축 발굴시 출토된 석인 5기는 오방기를 세워 놓았다. 세병관 우측 쪽문을 나오면 잉번청이 있다. 잉번청은 6방의 색리가 수직한 관아다.즉 번을 서는 관아다.  12공방은 12개의 공방이 있는게 아니고 많다라는 뜻이다. 공고는 진공품을 만들던 곳이다. 여기서 진상품은 모든 종류의 물건을 말하고 진공품은 지역의 특산품을 올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공내헌은 공고를 관리하던 관청이며 공록당은 진공품을 관리하던 관아다. 칠방, 화원방, 야장방, 입자방, 총방, 소목방, 주석방, 상자방, 은방, 화자방, 동개방, 안자방, 패부방, 미선방, 주피방, 선자방등이 이었다. 여기서 입자방은 통영갓을 만드는 곳으로 갓은 양반들의 나들이시 반드시 갖추는 의관중 관모다. 말총으로 만드는 총모자일과 대올로 만드는 양태일 그 둘을 연결하는 입자일로 나뉜다. 그럼 총방은 말총(말꼬리털)으로 망건, 탕건, 유건을 만드는 곳이다. 화자방은 가죽신을 만드는 곳이며 선자방은 부채를 만드는 곳이다. 선자방에서 분리된 것이 미선방인데 미선과 단선을 만들던 곳이다. 야장방의 철편이 레이져 가공된것을 전시하여 당시와는 다른 점이 안타깝다. 백화당으로 왔다. 중국사신을 맞이 했다는 것은? 확인해 볼 일이다. 일전에 rce총회때 이곳에서 회의를 한적이 있다. 백화당은 비장들이 근무하는  통제사 막부이다. 즉 호위무사나 비서진이라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인원을 호칭하는 단위를 알아보자. 원은 장교나 관료들, 명은 일반인 구는 노비들을 말한다. 운주당으로 왔다 운주당은 통제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원래 외삼문인 혜안화문이 있었다. 그 앞에 하마비가 있으며 운주당으로 들어서는 외삼문도 삼문인데 복원은 외문으로 되었다. 들어서면 좌측은 병고인데 그 안에는 각종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천자, 지자, 현자, 황자와 총,  칼, 활등이 걸려있다. 그런데 이곳은 고증이 잘못 되었다고 한다. 이 창고는 보인들이 병역의무 대신에 낸 군포를 관리하던 곳으로 군자금의 창고였다고 한다. 어떻게 고증 하여 이런 오류가 있는지??? 방군포를 관리하던 창고란다. 포布면 베를 이야기 한다, 베는 현금과 같아 병사들의 급료와 각종 무기구입등등 중요한 자산이라고 한다. 운주당으로 들어가는 긴 회랑이 있었으며 운주유악이라고 장막에서 전쟁의 승리만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때부터 생긴 통제사 참모 지휘소이다. 경무당은 통제사의 휴식공간으로 누마루가 있었는데 북원에서 누락 되었다. 이 경무당에는 각종 편액이 걸려있었다. 경무당, 선위당, 호소각, 침과당등이 있었으며 누마루에도 편액이 걸렸다. 내아를 거쳐 후원으로 올랐다. 왜란이후 전쟁에 대비하여 남방의 관할하던 통제영이 이후 일본과의 교류로 조선 통신사가 활발히 교류되어 할 일이 줄어들자 먹고 노는데 집중을 한다. 그래서 후원에 각종 정자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읍취헌, 의두헌, 육의정이 있으며 대밭에 황간발,용보문이 있다. 후원의 뒤를 돌아 내려오면 주전소가 있다. 주전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조선시대 돈을 만들던 곳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을 발굴하여 발굴모습 그대로 보존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되어 아직 연구가 채 되지 않아 잘못 복원되면 않되므로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남겨준 것이다. 정말 이것은 마음에 드는 일이다. 그냥 부수고 대충 복원하는 형태를 벗어나 후학들을 위하여 남겨둔 것이  매우 현명한 처사다. 돈을 만들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진 통제사의 위상을 생각 할 수 있는 유적이다.  통제영지의 수업은 처음이라 하시며 매우 조심스러워 하신다. 문화재청에서 고증을 받아 복원을 했으나 100% 완벽한 것은 아니다. 즉 예산에 맞추어 복원을 한 흔적이 있다. 그래도 번듯한 통제영을 만들었으니 잘 운영하여 나날이 발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미진하여 다음날 다시 찾아 둘러 보았다. 후원 뒤로 돌아 선자방 우물까지 확인하고 후원 위에서 보는 통영항과 세병관의 지붕선은 기막힌 조망을 제공했다. 세병관은 언제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최고의 건축물이다.


2014.4. 29 통제영지에서 백세청풍 김용재 



▲통영의 중심 세병관

▲중영 외삼문

▲중영청

▲응수헌

▲결선당

▲망일루

▲산성청

▲좌청

▲두룡포기사비 대좌가 묻혀 있다는 곳

▲두룡포기사비

▲석인

▲축대에 뚫린 구멍

▲잉번천

▲클로버를 죽이기 위하여 소금을 뿌렸다

▲레이저 절단된 무쇠들?

▲은방,석방(주석방)

▲공내헌

▲공록당

▲백화당

▲옛사진 세병관

▲세병관 뒷태

▲통제사 비석군

▲운주당 옛지도

▲운주당

▲경무당

▲옛지도

▲내아

▲읍취헌

▲의두헌

▲육의정

▲황간발

▲주전소 발굴지

▲통영신사



▲주전소 발굴현장


▲화로



▲해안화문 자리

▲하마비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