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가족 이야기

아버지의 기억(녹취) 2014.6.7

청풍헌 2014. 6. 13. 08:44

토지개혁을 조봉암이 했다. 지주들의 토지 개혁을 했다. 공출 내라고 해 정지(부엌)에 숨겼다. 어머니 집은 잘 살았다. 80%가 소작농 이었다. 20%가 자작이다. 지방 유지를 독암이라 했다.  제독암은  어머니 집인데 잘 살았다. 공출은 세금입니까? 세금이 아니고 스스로 내라는  강제성을 띈 강탈이었다. 왜놈들의 군비 식량 확보 차원 이었다. 소마구 여물통 밑에 길다랗게 구덕을 파서 술을 숨겼다. 왜놈들이 쇠짝대기를 쑤시어 도가지나 소도방 소리가 나면 발각되어 벌금을 내었다. 농사를 지을려면 술을 먹어야 한다. 누룩을 만들어 실겅에 올려 놓았는데  적발되어 도갓집에 주었다. 도갓집에 가서 술을 받아가는 동네와 안 받아가는 동네를 구분하여 술치러 보냈다. 해방전에도 술치러 왔다. 소죽 끓이는데 왜놈들이 와서 쇠짝대기로 쿡 쑤시고 다녔다. 해방후에도 밀주 단속을 했다. 술치로 온다고하며 집을 비우고 도망을 갔다. "아무것아 너거 밀밭에 소들었다"가 신호였다. 나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밀은 많이 심었습니까?  논이나 밭에 심었는데 베어 내고 모를 심었다. 보리대는 거름이 되어 나락이 잘 되나 밀 껍대기는 잘 썩지 않아 거름이 안된다 들어낸다. 써레 이빨에 감겨 두름에 주어 내었다. 밀끌티를. 구릉에 보풀이 나서  온 논에 펴졌다. 주워 내어야 했다. 잎만 동동 뜨는 풀인데 잎을 흩어 놓은것 처럼 생긴 풀인데 뿌리가 쪼금 있으며 나락이 잘 안되어 제거했다. 자운영은 나물도 해 먹었다 남의 논에 자운영을 낫으로 베어 무쳐 먹었다. 오래 있으면 보라색 꽃이 피고 씨를 받아 다시 뿌렸다. 논에 거름했다. 예전 논을 세번을 메어야 한다. 풀을 메지 않으면 나락이 안된다. 대나무로 토시를 만들어 논을 메었다. 후에 기계로 밀면서 메었다. 그래도 사이사이 김을 메었는데  나중에 제초제가 생기니 수월했다. 입제를 뿌리면 잡초가 생기지 않았다. 이후에 급속한 근대화가 되었다. 식량증산이 되었다. 논 써리는 것도 품앗이를 했다. 논 써리는 것도 용호네가 " 이 세씨불난 소야 빨리가자" 용호네 아붐은 술을 안먹었다.영문이는  술을 좋아해서 많이 먹었다. 설시잽이가  앞써레질 앞잡이다. 4~6마리씩 써레를 했다. 중참을 해 먹이고 소여물도 끊여 이고 갔다.


남희도는 국립묘지에 있다. 육국 중사 남희도로 되어 있었다. 6.25 유공자였다. 용호내 아붐인지 형님인지 당시 소 한마리 팔아서 유공자를 했다는 말이 있었다. 유공자가 되면 혜택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알았다. 두 집안의 형제간이 싸워서 결국은 시어매 죽어서 밥해준것 장가갈 때 해준것등 돈을 받았다. 아무개 시집갈 때 뭐해준거 다 돈을 내어 달라하여 주었다. 용건가 잘못 한다고 저세끼 때리 직이모 술받아 줄깨했다.  성포집에 간다고 갓는데 간장인가 상추를 가져 갔는데 섭이가 술을 먹고있어 반가워서 돈을 2만원 주더다. 도천동 장어통발 수협에 근무하다 바다에 실족하여 죽었다. 낚시배 하다 낚시배를 팔고 취업 했는데 실족했다. 예전 각시와 애 둘을 데리고 산소에 간다고 왔었다. 영문이는 까막골에 논 팔아 매일 술을 먹었다. 내가  3만원을 빌려달라 하여 보관 햇는데 사흘만에 노름을 하여 다 뺏기고 달라고 했다. 목섬에 노름이 심했다. 죽을 당시에는 못먹어서 죽었다. 죽을 끊여서 갔다주고 담부랑 밑에서 비식히 앉아 있어 우유도 주고 했다. 실이 저그 엄마는 간질을 했다.  술이 위에 아들이 홍역으로 죽었으며  그것 죽고나서 발병을 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입관 한다고 여럿이 가니 목 뒷들미에  이가 모여 있었다. 벽을 타고 이가 버글버글 했다. 당시에 이가 올라서 십겁햇다. 용덕네 어뭄 살아서 새매가에서 죽었다 장에 갈려고 상추하고 시금치를 태산같이 청(마루)에 부닥트려 놓고 마당 수돗가에 앃다가 넘어졌다. 미숙이가 집에 찾아오  옴마을 찾앗는데 집에가니 방에 데려다 놓고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때 벌써 죽었다. 


우사근에 야학이 있었나요? 야학이 있었다. 실이 저거집 뒤에 야학이 있었다. 동사? 동네 사랑방인데  인규가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할매들 모아놓고 빈집을 동사로 사용했다. 실이 저거 집 뒤에 지금의 난서밭이었다. 동사 했다는것은 기억난다. 동네 회관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할매들을 가르쳤다. 빈집 이었다. 집이 비어 있으니 옛날에 누가 살았는데 조구냄이 저거 삼촌이 살았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었다. 구냄이 삼촌이 살다가 마산으로 이사가고 비었다. 구냄이는 도토지에 집을 지어 살러갔다. 인선네가 성포 넘어가는 돌바구에 집이 있었다. 철봉이네 밭에 집이 있었다. 서너가구가 있었는데 너무 외따로 있어 조구남에게 사서 이사를 왔다. 인식,인선,연순,인수,인철이다. 인선이네 집이라 했다. 구냄이는 도롬에 외딴집을 지었다. 천해기 영감집 밑이다.  해수욕 하러 다닌 중간쯤에 있었다. 놀다가 가곤 했다. 조구우,조규택, 조구남이고 구남이는  아들이 셋이고 딸이 둘 있었다. 


목섬 도토지에 반봉은이 있었다. 왜놈의 "도라" 어장막 이었다, 반봉은이 큰아들이 반병이 였는데 나의 동서다. 반봉은이 동서 보증서주라 해서 그때 안 서주었다. 반봉은의 전처 큰아들이 반병이였는데 아버지의 동서 즉 이모님의 남편이다. 이모는 할매하고 청곡에 살았다. 어장한다고 따로 살았다 . 어장에 자고 하면서 피난온 여자를 얻어 주었다. 딸을 하나 낳았다. 반봉은의 전처는  아들 하나하고 딸 하나 있었다. 조남배가 장자골에서 잘 살았는데 반봉은이 아버지 한테 보증을 섯는데 망했다. 그때 반봉은이 충청도에 가서 왜놈에게 붙어 돈을 벌어서 도라 어장을 샀다. 반병용 등은 재처의 소생이다. 이숙도 죽고 사근에 시집온 사람도 죽었다.이모는 청곡에서 시 할매 하고 살았다. 시할매가 병이 들어  팔고 성포 끝에 카부에 옛날 대구집에 있었는데 구멍가게를 했다. 영감이(반봉은) 큰 아들이라고 돈을 뜷어갔다. 외항선을 탔는데 월급을 반봉은이 가져가고  쌀만 조금 주었다. 다시 목섬에 살러왔는데 태풍에 집이 떠내려가 식구대로 이모집으로 들어왔다. 못살것 같아 성포 갱이집으로  이사왔다. 도저히 여기서 살 수 없어 서울로가 도생이 집 짖는데 이모가 먼저가고 이모부는 뒤에 갔다. 서울에서 학구방에서 자는데 큰아들에게 찾아와서 자고갔다.  이모 딸이 그것도 제 고모한테 4천만원이나 빌려주어 떼였다. 고모에게 꼬여서 돈을 빌려주어 사기를 당했다. 폰새는 이모 아들이고 딸이 두명 있었다. 폰새는 기사생활을 했는데 음주운전 사고로 죽었다. 병이 이모부는 죽어 화장하여 유골을 가져와서 천해기 집 있는데다 묻었는데 잡풀이 우거져 사라졌다. 묘가 없어졌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묘가 사라졌다. 동생이 묻는다고 그곳에 묻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흔적을 남겨서 뿌듯하다. 강기평하고 연대가 비슷 합니까. 강기평이 좀 젊다. 반봉은 하고 비슷하다. 이모집의 딸이 순자 하고 하나더 있다. 집에 한번 왔다. 내의를 사왔다. 어머니가 많이 베풀었다. 못살때 할만네 하고 밥하고 나물하고  들고 갔다. 


어찌하여 이모님은 결혼을 했나요. 사등의 외숙모가 중신을 햇다. 어머니의 외갓집은 사등 조씨다. 외외숙모가 중신을 했다. 외숙모는 사근 큰집이 친정이다. 외숙모가 나(어머니)를 중신을 햇다. 아버지의  사촌누나가 외숙모가 되었다. 멋쟁이엿다. 일본갔다 와서 인물이 좋았다. 외숙모가 일본가서 벌여 논사고 했다.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어 살림을 일으켰다. 아버지 제사때는 메쌀을 가져오고 했다. 큰집의 할바시를 제실에 빨리 올렸다. 고모가 더런 연놈들이 자기가 벌어 살림을 모앗는데 너그가 의논도 없이 제실에 올렸다고  비틀어 졌다. 그래도 제사때는  전화라도 해야한다, 한놈도 전화를 안하고 필수 아들이 전화를 했다. 태빈이가 그러더라. 익준이가 산을 100평만 파라고 했다. 산림을 말아 먹었다. 익준이가 동뫼산이  일곱마지긴데 생이로 욕을 한다 좀 안준다고... 어렵게 살았는데 동생들이 손을 벌린다. 집뒤 산을 팔아 먹을 것이다. 집터에도 땅이 좀 있다. 별도로 되어있다. 필지가 틀리다. 태빈 형님은 해병대다. 달력을 가져온다. 


갈!  갈이다. 갈 잎파리라 했다. 야들야들 했다. 논에 이것이 퍼지면 나락이 안된다. 납작한 것은 보풀이었다."갈"이 번지면 나락이 노랗게 된다. 구렁논에 발이 빠지며 갈~을 주워 내었다. 밑에 논들이 구릉논 이었다. 당동 화당리에 영구네 집에 친척이 있나요?  부고를 전해준 적이 있는데... 부고장을 갇다 준 기억이 있는데 춘식이 저거 할매인지 초상때 갔었다. 춘식이 집이 영구가 막내고 영호하고 큰아들이 나환자 였다. 큰 아들이 먼저 소록도로 갔는데 가운데것도 다리를 절어 결국 부산 나환자촌으로 갔다. 초상때 왔다. 막내가 영구다. 딸은 지석에 살았다. 화당 간것은 종고네집 조모 초상때인것 같다. 종고네 고모가 당동에 산다 . 옥자네 큰 고모가 둘이 고성에 산다. 큰것은 나하고 한 동갑이다. 작은것은 서방이 군에가서 죽고 집에 와서 살다가 고성으로 시집 갓는데 통도 메고 장군도 메고 했다. 거기 가서 아들 놓고 잘 산다. 그러면 종고네 할매 죽엇을때인것 같다. 흥선이 딸이 제산으로 시집왔다. 피난민들이 왔다. 형님 세살때 피난민들이 왔다. 노래와 춤을 잘 하고 영감은 양복쟁이고 딸 둘 하고 아랫방에 살았다. 이름은 김홍구이고 딸은 옥순,작은거는 곰보다. 형님을 좋아했다. 뭣을 뚜드리면 춤을 추었다. 아랫방에서 살았다. 중학교 들어갈 때 부산서 가방과 옷, 모자를 사서 왔다. 시집 갈때는 찹쌀 한 말 떡을 해가지고 갔었다. 부산을 가사 살았다. 큰딸이  시집을 잘 못갔다. 피난민들이 집집마다 있었다. 동네 뱀을 다 잡아먹고 정골 고랑에 움막을 치고 여럿이 살았다. 웃두밭 위에 원두막을 짓고 정맹이 저거 아부지가 살았다. 목섬 계단 옆에 집이 있었는데 구조가 틀렸다. 부엌과 방이 트인  흥남식이다. 소똥을 섞어 벽을 발랐다.


20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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