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가족 이야기

마을의 일상 기억(2014.5.28 채록)

청풍헌 2014. 6. 4. 09:04

목섬에는 왜놈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그곳에 중학교을 만들고 지금 중학교 자리는 사등공민학교을 만들었다. 4년제였다. 웃사근은 사등공민학교를 만들었다.

목섬의 소학교는 일본인만 다녔다. 그때 당시 조선인은 어디를 다녔습니까? 거제에는 왜놈과 공동으로 다녔다. 어머니는 10살때 입학하여 16살에 졸업했다. 당시에 선생은 왜선생과 한국선생이 같이 있었다. 전부 왜말로 했다.  당시 일본이름은 모로하리 히데코 였다. 졸업 할때까지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의 일본이름은 뭐라고 했나요? 뭘라고 그러노? 일본선생이 동그리하게 생겼다. 그 선생 기억은 난다. 이름은 모르겠다. 한반에 60여명 정도 된다. 공부 잘하고 부자집은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가 있었다. 왜놈들과  같이 다니던 중학교에 가는 사람은 가고 안가는 사람도 있었다. 수학여행도 못갔다. 할아버지가 가스나들이 뭐하러 갈끼고 하여 서울로 수학여행을 못갔다. 학교 다니는것만 해도 엄첩다. 옥산에서 여자가 4명이고 화산에서는 나 하나 뿐이고 머시마들이 있었고 귀먹정이에 살았다. 옥산 딸아이 들이 선배였다. 길이 갈리면 옥산 아들과 같이 오면 머슴마들이 당기머리를 당기고 했다. 옥산 아이들과 같이 가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나이가 좀 많았다. 김성안이 외가집이 윤씨들이다. 잘 살았다. 거제국민학교가 100년이 넘었다. 내가 42회 졸업생이다. 졸업사진을 구하여 다시 제작하여 배포 했는데 이사 하면서 어디 갔는지 모른다. 급장(반장)하던 정오는 간닥에 살았는데  늘 급장을 했다. 학동에도 한명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많이 죽었다. 다 죽고 학동 하고 정오하고 네명이서 계를 여러번 모았다. 왜놈들이 하는 일식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초밥집에 가서 먹었다. 초등학교 때 교장을 했다. 그 마누라가 폐병이 들어서 뱀을 잡아 단지에 담아 놓았는데 술을 담가서 약 해먹었다. 고와도 먹고 하여 폐병 때문이 고생을 했다. 폐병하면 종덕이 형님이 생각난다. 그 아들이 4~5살때 불을 내어 놓고 농안에 옴싹 들어 있었다. 상택이 집이 잘 되었다. 아들4명, 딸이 둘이고 집과 도토지 터를 팔아서 지금은 장평에 산다. 도토지 내려가는데 종덕이 저거 밭이다. 비렁이고 엉장이 되어 옳게 해먹지 못했다. 큰딸이 성포 있었는데 장~ 돌봐주고 했다. 큰 사위가 태식이다. 그도 죽었다. 니는 만다고 성포 갔더노?  친구 돌평이 아들 결혼식 참석하고 나릿고지 수틀기미에서 한잔 하고 성포 갔습니다.


해치하러 안정사까지 갔다. 위에 암자까지 너무 멀어서 가지 못했다. 웃사근 동네에서 갔다. 아래사근하고 같이 했다. 안 간 사람도 있다. 안정사도 가고 제승당에도 갔다. 제승당은 웃사근 사람만 갔다. 매구를 갖고 깄다. 배를 타고 갔다. 대절 택이다. 기관장 하던 사람들이 선주에게 부탁하여 갔다. 떡다라이가 구멍이 뚫려 물어 주었다. 실이 저거 아버지가 떡 한다라이를 내리다가 탁 놓았는데 구멍이 뚫려 물어 주었다. 소임이 도라 할매였는데 모든 물건에 표를 하였다. 제기와 다라이들에 표를 했다. 진해도 갔다.  벗꽃놀이도 갔었다. 진해도 풍물을 갖고 갔다. 별 볼것은 없었다. 마을 단합대회를 해치라 했다.  놀러가는 계를 하여 서울도 가고 여러곳에 다녔다. 맹기 각시하고 용덕이 저그매 하고 안갔는데 선물을 샀는데 돈 안준다고 욕을 하고 혹돔네는 욕을 하고 햇다. 그래서 좀 모아서 주었다. 그돈으로 비료를 샀다고 하더라. 제승당 해치하러 오면 술을 먹고 쌈을 많이 한다. 막거리를 한통씩 싣고갔다. 봄되면 흔들바우 너른곳에 점심하여 놀고 했다. 돈 관리를 내가 했다. 용덕네 어뭄은 영감때문에 못갔다. 웃두밭 재 산소옆에서도 그곳에서 놀고 했다. 재미었다. 쌀 큰 되 한 되씩 모아서 소임집에서 밥하고 재미가 있었다. 노래는 옛날 노래를 불렀다.  도라지. 아리랑 등등 이었다. 옛날에는 노래가 문틀이 있었다. 가마집이 있었는데 비가 새서 이엉을 엊고했다. 가매집이 있었다. 조복이라고 남자들이 입는 전통 옷을 우리집에 갔다 놓았다. 벼슬 않하는 사람들이 결혼식에 한번 입는 조복이었다. 족두리 수실도 떨어져 꿰매기도 했다. 조복과 쪽두리를 두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생이집도 돌로 가지고 쌓아 나무를 걸쳐 영을 이었다.  한집에 한장씩 공출을 했다. 성뜰 밭에 가면 보였다. 꽃계, 상두계, 화관계, 화당계(꽃계). 쪽두리계, 조복계, 장옷(여자옷), 계를 모아서 옷을 구입하여 여러해로 사용했다. 빌려주면 세를 받았다. 계를 든  사람은 그냥쓰고 목섬 사람들이 빌려갔다.  빌려 가면서 세를 받아서 사용했다. 계 모은다고 천해기 영감, 다라네 영감, 종고네 영감들이 말술을 먹었다. 천해기 영감하고 종고네집 하고 사돈간이다. 전부 계를 했다. 괭이계도 있었고 담장계도 있었다. 신작로 딱는것 부역 하는것이다. 마을 길 만들때 사진이 있다. 84년도 동네 마을 길 하던 것이다. 연탄 내릴때 부레키가 없어 짝대기로 걸었다. 종고네 집에서 우리 소가 순했는데 빌려가  차가 궁뎅이를 지어 박아서 결국 못쓰게 되었다. 소가 눈물을 흘리더라. 기와집 한다고 흙을 많이 올렸다. 기와는 학교에서 사왔다. 당시 학교에 쓰던 왜놈 기와라 좋은것이라 했다. 

2014.6.2 미수동 황용연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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