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통영 충렬사 명조 팔사품의 진실은?

청풍헌 2014. 11. 28. 05:34

통영 충렬사 명조 팔사품의 진실은?

 

통영 충렬사는 1606년 왕명으로 지어진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다이 사당에는 보물 440호로 지정된 명조 팔사품이 소장되어 있다. 명조팔사품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지금까지 알려진바로는 이순신 장군을 숭상한 명나라 진린 도독이 명 황제 신종에게 건의하여 신종이 이순신장군에게 내린 하사품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것이 언제 누구에게 어디로 전해졌는지 미스테리였다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연상 시키는 의장품으로 대대로 이어진 통제사의 의장물로 기능을 했으며 위엄을 갖추고 장군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처럼 통제사와 한 몸으로 취급 되었다. 통제사의 모든 공식 행사에 동원 되었으며 통제영이 폐영(1895)된 이후에는 충렬사에 보관 되었다


누가 감히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이 팔사품을 의심할 것인가? 거의 신의 영역으로 느껴 진품조차 친견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수장고에 보관 했던 보물이다. 충렬사 유물전시관, 해사 박물관, 현충사 등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있다. 작년 진주박물관 통영 특별전에 진품이 전시되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진품을 직접 볼 수 있어 경외스럽게 보았다. 직접 바라보니 가슴이 울렁거렸고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한서대 문화재보관학과 교수인 장경희 교수가 팔사품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팔사품이 신종황제가 내린 것 아니라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통제영에 남긴 것 이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사실 통영 충렬사는 통영의 정신적인 중심이다. 그래서 충렬사 출입시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출입 했으며 큰 소리를 낼 수 없으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참배를 한다. 감히 어느 물건이라고 의심을 할 것인가? 1606년 창건 이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며 수많은 문건과 장서와 기록이 있을 것이다


장경희 교수는 이순신 장군을 숭모하여 여러 과제 중 팔사품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명조팔사품은 815점이다. 1. 도독인과 도독함궤 2. 영패 13. 귀도 14.참도 15. 곡나팔 16. 독전기 17. 홍소령기 18. 남소령기 1쌍이다. 815점으로 1964년 보물 440호로 지정 되었다. 그럼 기록을 찾아보자, 최초의 기록에는 김육이 지은 1656년경의 신도비문이 있다. 김육은 이순신의 외손자가 부탁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비문을 짓는데 인조 때 대재학을 지낸 이식의 이순신 시장(1643)을 참고삼아 신도비문을 작성했다. 비문에는 드디어 명나라 황제에게까지 아뢰니 황제 또한 가상히 여겨 공에게 도독인을 내려 지금가지 통제영에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에는 도독인만 언급되었다. 이후 신석겸의 선묘중흥지에 공식적으로 팔사(八賜)가 언급된다. 1795년 정조19년에 이충무공 전서의 도설에 도독인을 비롯한 8종과 장병기 및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이후 신관호 통제사가 그린 팔사품도 간기에 팔사물로 기록 된다 196634일 보물 지정서와 이후 팔사품이 공식 기록된다. 즉 최초에는 도독인만 언급되며 이후 팔사- 팔사물- 팔사품으로 변천 되었다. 그러면 중국 기록에는 없는지 살펴보자. 진린은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귀국하여 명의 신종에게 큰 상을 받는다. 이때 명의 신종 신록에는 이순신은 조선의 신하 이므로 그 나라에서 휼전을 베풀도록 하였다.“ 라는 공식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실록에는 도독인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유명조선수군도독이라는 칭호는 정조 17(1793)에 증직 된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도독인에 대하여서는 연구결과 사인(私印)이라 단정 지었다. 즉 명나라 황실의 공식적인 인장이 아니라 진린 도독이 전쟁을 마치고 귀국하며 이순신 장군을 기리며 통제영에 내린 개인적인 물품이라 추정했다. 아직 인장의 글자도 밝히지 못했으며 그나마 중국 인장학 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진 글자 중 황실 인장에 쓰지 않는 장()과 마()가 있어 아니라는 것이다. 도독 함궤 중 외궤에는 황조어사인이라는 문구가 금속으로 오려 붙였다. 다음 팔사품 병풍도와 현존하는 유물을 비교하면 수군도독인(온양 민속 박물관,아산 현충사 소장본)과 황조 어사인(신관호 제작본)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수군도독인으로 불리우다 황조어사인으로 변천 했다고 추론했다. 영패의 주머니 안쪽에는 명문이 붓글씨로 쓰여 있는데 신유(辛酉)삼월일, 신등신비(申等新備)라 기록되어 있어 이것은 신관호 통제사가 제작 했다는 이야기다. 귀도와 참도는 명나라 제작 기법이 있으며 당대의 작품으로 사료 되지만 장식 기술이나 문양의 질은 떨어져 황실 하사품으로 격이 아니란 결론이다. 곡나팔은 도설의 제작 기법과 비슷하여 진품으로 추정되며 깃발 3종류는 현존하는 유물과 이충무공 도설, 팔사품 병풍그림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후대에 다시 제작한 것이라 사료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유물의 정확한 치수인데 이것이 현존하는 유물과 기록상의 치수가 차이를 보인다. 보물을 지정할 당시 보고서도 없으며 정확한 실측도 하지 않아 이렇게 50년간 세월이 흘렀다. 더군다나 과거 충렬사 수장고는 시설이 열악하여 항온 방습 시설이 없이 유물을 지켰다고 한다. 탈 변색이 진행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으며 지금은 통영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비교검토로 명조팔사품은 명의 신종 황제가 내린 것이 아니라 진린 도독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며 이순신 장군을 기려 통제영에 내린 선물 이라고 추정했다. 비록 선조실록이나 명 신종황제의 실록에 없다고 사인이니 진린이 내린 것이니 결론을 추론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신도비문은 무엇인가?


질의응답시간에 실란한 비판과 질문이 있었다. 학문을 하는 학자에게 부당한 질문도 있었으며 날카로운 질문도 있었다. 그만큼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통영의 어른들이 뿔났다. 지금까지 신성시 되던 팔사품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한껏 감추고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팔사품을 연구한 최초의 논문이며 과감히 지금까지의 기록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한 장경희 교수는 앞으로 팔사품과 비교할 중국의 유물과 진린장군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며 팔사품도 병풍과 수조도 병풍에 대하여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 향후 세부 과제로 다룰것이라 했다.


▲박물관 도록(실측과 치수가 다름)

이충무공 도설에는 귀자(鬼子)가 있음

2014.11.19 통영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