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매달 발제를 하면 좋은 자료가 모여 1년후에 이배사 통영지부 자료집을 발간하자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청풍헌 2015. 4. 7. 21:36



이배사 통영지부 4월 모임 발제

                                                           발제자금갑도만호

한산도 제승당(사적113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한산도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계사년 7월 진()을 옮긴이래 1,340일 동안 머물렀으며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쓰셨다

금갑도만호님의 바쁜 업무와 숙제에 대한 부담으로 고민하다가 한산도 번개 자료집에서 발췌하여 유인물로 대신 한다고 했다유능한 해설사라 공부한 자료를 계속 전달하고 반복 학습함으로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거침없이 나왔다초기 운주당에서 제승당으로의 유래와 군량과 무기를 건조하는 과정을 부분 발췌 했으며 특히 한산도 진영에서 무과시험을 두 차례나 치렀다그 과정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분조로 인한 광해군이 남쪽의 군사들의 편의를 위하여 전주에서 무과 별시를 보았는데 여러 사유로 갈수 없으므로 한산도 현지에서 별시를 요청하여 1594년 4월 6~8일간 1차 시험을 치렀다2차는 1596년 이었다전주 별시 때 유형이 합격 했으며 충렬사에 있는 유형 통제사비는 후손인 5.16 혁명실세인 유근찬이 1976년에 세웠다또한 이운용에 대하여 코멘트가 있었다이운용은 옥포만호시 장군과 만났으며 이후 웅천현감 직책을 수행 했으며 전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충렬사를 세웠다충렬사의 통제사비는 1951년 통영의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한산도 진영에서의 무과 별시에 대하여 고상안님이 발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이유는 1차 시험 때 참시관을 한 인연으로 연구하여 숙제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숙제를 기대해 본다. 통영지부 모임소식을 이배사 카페에 공지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며 이렇게 매달 발제를 하면 좋은 자료가 모여 1년후에 이배사 통영지부 자료집을 발간하자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 모임은 공부하는 모임이다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알아가는 좋은 모임으로 매달 첫 번째 목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다음 모임의 발제자는 금갑도만호님이 한산도 번개자료집을 복사해오는 것으로 했다.


발제자료


한산도 제승당 (사적 113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1. 조경 : 제승당 유허비(고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한산제승당 유허비)

- 통제사 조경이 1739년(영조15년) 재승당 옛터에 유허비를 세운것

- 조경이 글씨를 쓰고 도사 정기안이 글을 지었음​

2. 조현명 : 제승당기

- 조경이 1740년에 제승당을 세우게 된 뜻을 조현명이 편액에 새겨서 전해온것

​3. 이태상 : 제승당 중수기

- 통제사 이태상이 1760년 제승당을 중수하게 된 연유를 편액에 새겨둔 것

4. 이규석 : 제승당 유허비

-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선무공신 영의정 덕풍부원군 행삼도통제사 시충무 이공순신 한산도 제승당 유허비

- 이순신의 10세손 통제사 이규석이 1877(고종14년) 11월에 세운것 비문은 정기안의 옛글을 그대로 새겼다.

運籌於유幄之中(운주어유악지중)

制勝於​千里之外(제승어천리지외)

군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얻게 한다.

사마천,(史記) '고조본기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군량 때문에 걱정하여 백성을 모아 둔전을 짓게하고 사람들을 시켜 고기를 잡게 하며, 소금 굽고 질그릇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하는 일이

없었고, 모두 배로 실어 내어 판매하여 몇 달이 채 안되어 곡식 수 만석이 쌓였다.

(이충무공전서 전9권)

난중일기는 1,491일(임진년 4월 13일부터 계산)중 1,029일, 임진장초는 현재까지

전해오는 78편중 45편이 한산도 제승당에서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진, 정유재란 2,374일(임진년 4월 13일부터 무술년 11월 19일까지 계산)중

1,340일을 머뭄.

전선의 건조. 총통의 제작. 군량의 확보.​ 통제사의 지휘권 문제등에 이르기까지

*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의 각 고을의 병사들을 전적으로 수군에 소속케하여 전선을 곱절이나 더 만들게 하면 전라좌도의 5고을 5포구에는 60척을, 전라우도의 15고을 12포구에서는 90척을, 경상우도에는 변을 겪은 나머지라 조처할 방도가 없다고 할지라도 40척은 정비가 되며 충청도에서는 60척은 정비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합하면 250척은 될것입니다..

* 모든 물자가 고갈되어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순천, 흥양 등지의 넓고 비어있는 목장과 농사 지을만한 여러 섬이 많으므로 관청 경영으로 경작케 하든지 혹은 민가에 주어서 경작을 시키든지 군사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싸움이 있을 시에 출전하면 싸움이나 지킴에도 방해가 됨이 없이 군량을 조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전선을 곱절이나 더 만든다면 지.현자총통들을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육지의 각 고을에 있는 총통을 급속히 수군으로 옮겨 보내 주어야 하겠습니다.

* 수사는 수군의 대장으로 무릇 호령을 내려도 각 고을 수령들은 자기네를 관할 할 수 없다고 핑게를 하고 심지어 군사상의 중요한 일까지도 내버려 두는 일이 많이 있어 일마다 늦어지게 됩니다. 이런 큰 전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하기 어려우니, 전란이 평정될 때까지는 감사와 병사의 예와 같이 수령들도 지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임진장초 계사년)​

전쟁물자 확보 방안의 일환으로 화약과 총통의 개발에 착안하여 대장장이로 하여금 보다 새로운 총통을 만들어 보게 하고 다시 한산도로 옮겨온 이후 중들을 모아 '화주,라고 이름하고 권선문을 지어 여려곳을 다니며 우선 철을 많이 바치는 자에게는 표창도 하고 면역, 면천, 허통(신분에 따라 벼슬을 제한하는 것을 없애는 것)도 할 수 있도록 건의 하기도 했다.

* 신이 여러 큰 싸움을 겪으면서 왜적의 조총을 노획한 것이 많았으므로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법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조총은 총신이 길기 때문에 그 총구멍이 깊숙하여 나가는 힘이 맹렬한데 비하면 우리나라의 승자나 쌍혈총통등은 총통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그 맹렬한 힘이 왜의 총통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조총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대장장이 낙안의 수군인 이 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란하여 본영에 머무르는 김해 절 종 동지. 거제 절​ 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이 조총과 꼭 같습니다. 또한 일하기도 어렵지 않아 수군 소속의 각 관포에서 우선 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하였으며, 한 자루는 전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각 고을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도록 제의 했습니다. 지금 당장에 적을 막아내는 병기는 이보다 좋을것이 없습니다. 정철로 만든 소총 5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내니 조정에서 각 도와 고을에 명하여 만들어 쓰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만드는데 힘쓴 정사준과 대장장이 이필종등에게 각별히 상을 내려 감격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고 모두들 서로 다투어 만들어 내개 함이 좋을것으로 사려됩니다.(임진장초 계사 8월 일 계본)​

한산도에서 과거 실시​

1593년 계사년 12월 광해군이 전주로 내려와 하삼도의 무사들에게 과거를 보인다는 공문을 받았을 때부터 조정에 건의함. 수군의 실정과 한산도에서 전주까지 응시자를 보낼 수 없는 이유등을 열거하여 한산도에서 시행해야 한다고 거듭 건의

* 12월 27일 시험일은 물길이 너무 멀고 험해 기한 내에 도착 불가

* 적이 언제 침범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군사들을 일시에 내 보낼수 없음

* 수군에 소속된 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이 들어 있으나 먼 바다에 떨어져 있는 섬에서 말 달릴만한 땅이 없으니 말 달리고 쏘는 시험을 편전으로 쏘는 것으로 시험을 보자고 건의함.

부하들의 사기 함양과 인재 양성을 위하여

1차 : 1594년 갑오년 4월 6~ 8일 참시관 장흥부사 황세득, 고성현령 조응도, 삼가현감 고상안, 웅천현감 이운룡 시험관은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천수사 구사직. 합격자 100명을 1.2.3등으로 구분하고 주소, 직업, 성명 및 아버지 이름과 나이들을 아울러 별지에 기록하여 보내옵니다(임진장초 갑오 4월 11일)

난중일기에는 4월 9일에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하였으며, 9월 13일에 '군관 하 천수,가 서울로부터 홍패 97장을 가지고 왔다. 라고 했으니 실제 합격자는 홍패가 주어진 것은 5개월 뒤였음.

2차 : 1596년 병신년 윤 8월 10일 참시관은 광양현감, 고성현령













2015.4.2. 이배사 통영지부 4월 모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