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중국 이야기

영파 보고서21-1 영파에서 만난 고려인의 흔적(명주여고려교주사진열明州與高麗交注史陳列

청풍헌 2013. 4. 22. 22:46

 

 

오늘은 일요일 용해씨에게 부탁한 영파 시내 구경을 위하여 통화를 했지요.

절친인 P.E직장이 안내를 합니다.

얼마나 친한 친구인지 본인 차를 타고 알아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옆 호텔에서 폭죽이 터집니다.

가만히 보니 웨딩카가 들어 옵니다.

아마 결혼을 축하하는 폭죽을 쏘았나 봅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뒷처리를 하느라 비질을 힘들게 하네요.

 

나가시(불법영업차)를 타고 영파시내로 나갔습니다.

시내의 까르프 매장 앞에서 약속이 되어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며 카드로 중국돈을 1,000위안 인출 했습니다.

비밀번호가 4자리 이므로 위험하니 6자리로 바꾸라는 메세지가 뜹니다.

중국 은행은 비밀번호가 6자리 라네요.

 

기다리며 중국의 인권에 대하여 대화 했지요.

국민들이 너무 똑똑하면 다스리지 못하니 우민 정책을 쓴다는 용해씨의 의견 입니다.

배부르면 다른 생각을 안한다 뭐 이런 논리죠.

 

2~30년 전의 우리나라를 보는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었지요.

사람이 밥만먹고 살수 없다.사람 중심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2~30년을 내다보고 정책과 사고를 해야한다.

중국도 곧 민주화와 정책의 변화가 올것이다.

 

일 예로 영파에 화학공장이 들어선다고 지역 주민들이 반대 데모를 했다 합니다.

중국 정부에서 특수 경찰을 투입하여 주동자를 체포 감옥에 넣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화학공장의 건설 계획이 중단 되었다 합니다.

그것봐라! 국민들이 소리를 내면 언젠가는 정부도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위정자(시진핑)가 교체되는 시기라 그랬다는 의견이 있음)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많은 시민단체가 꾸준히 정부를 감시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참여할때 참된 국민을 위한 사회가 온다.

용해씨는 부정적입니다.한족들의 사고가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개인주의와 졸부들의 한심한 사고가 국가미래를 망친다고 합니다.

 

역대 중국의 역사에서 왕조가 바뀌는 때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역성 혁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되면 배부른 돼지가  되어 아무 생각이 없어 현실에 만족합니다.

그걸 노린거죠.

 

 

주해봉株海峰 지장과 그 여자 친구인 서아근徐아(계집여변에 버금아)芹씨가 나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주직장 차를 타고 월호공원을 이동 했습니다.

월호공원月湖公園을 알게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파에 대하여 검색을 했는데  길림성 신문이 포착 되었죠.

길림성 신문의 기고란에 영파의 고려관에 대하여 탐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 월호공원이 어디있지?

영파의 지도를 구하기 위하여 알아보니 코막 설계 강차장이 호텔 로비에서 영파지도를 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손짓 발짓으로

영파지도와 북륜구 지도를 구했지요.

 

영파의 고려관에 대하여 여러 검색을 하여 지식을 축척하고 월호공원을 가게 되었지요.

해류따라 바람따라 처음으로 닫는곳이 이곳 명주(영파의 옛지명)땅이라 합니다.

고려와의 활발한 교류로 고려사신이나 상관들을 관리하던 고려관을 발굴하여 복원 해 놓았다고 했지요.

 

 

월호공원은 옛 명주성 안에 있는 호수 입니다.

월호공원이 있으니 당연히 일호공원(日湖公園)도 있습니다.

공원의 동쪽 끝부분 언덕위에 위치 한다는 고려관을 찾아 이슬비가 내리는 호수길을 걸었지요.

 

 

 

 

 

넷이서 걸으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주직장 여친이 성격이 활발 합니다.

나이가 31살 이라니 완숙한 처녀티가 납니다.

그래도 좋다고 주직장 옆에 붙어 다니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댑니다.

아이폰 4s라 나도 아이폰인데 하고 동질감을 가졌지요.

 

프린트해간 지도를 보고 찾아 갔으나 잘 알수 없어 관리실에 물어 봅니다.

저쪽 다리건너라고 합니다.

약간 가슴이 설레입니다.

왜일까요?

 

타국만리 중국땅에서 옛 선조들의 자취를 만난다는 셀레임 이겠죠.

중국의 입장에서는 여러나라중의 하나 이지만 우리에게는 중요한 선조들의 유적 이지요.

보고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 집니다.

 

 

명주여고려교주사진열明州與高麗交注史陳列 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건물 입구에는

고려사관유지高麗使館遺址라는 빗돌이 있습니다.

건물 내부를 들어가니 보규조寶奎朝라는 현판이 있군요.

벽면은 당시의 교류 관계를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명주성이 그려져 있으며 고려사신과 무역관들이 송나라 상인들과 거래하는 모습이 있으며

당시의 사회상을 그림으로 표현 되어 있군요.

실내 양옆으로 큰 비석의 모형이 있는데 안내문에는 

"명주자사 누이가 고려사절 방문 및 사절 선박의 건조에 대하여 조정에 상주 하였고

소휘종이 옥필로 허가한 상주문인데 이 비는 월호의 금조당에 세워졌고 남송 초년에 은서 풍해묘로 옮겨졌다."

 

 

건물은 나오니 앞에 청동 상이 있습니다.

청동상의 손에 들린게 소고인듯 합니다.

아이가 있으며 무슨 소쿠리인지 항아리인지를 줄에 묶어 있군요.

무슨뜻인지 이해가 않되네요.ㅎㅎ

건물을 나와 다른 고려관으로 갈려고 하는데 문이 잠겼습니다.

비슷한 건물에 들어가니 관리인들이 나가라고 합니다.

다른 건물은 문을 닫았습니다.

너무나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네요.

고려관의 전시실에 장보고의 동상도 있으며 의통,의천대사도 있다고 했는데...

 

 

고려관을 보고나니 다른건 흥미가 없습니다.

옛 명주성의 지도가 있다하여 이동 했는데 도로 한가운데 3층의 큰 성 문루가 있군요.

명주성의 중앙으로 종을 치던곳이랍니다.

몇번의 화재로 새로 중수를 했는데 내가 보기는 좀 조악 합니다.

 

성벽돌과 배수구 등은 그대로인데 문루가 시멘트 기둥에 문살도 쫌...

문루에 올라가니 그림 전시회를 합니다.

좋은 기회다 싶어 그림을 찬찬히 둘러 보았지요.

 

 

 

수묵화와 유화도 있으며 두루마리에 화조도 맹호도 이태백과 술독 그림도 있군요.

중요한 그림에는 가격표가 있는데 2,000~25,000사이의 가격이 책정되어 있네요.

한화로는 360,000~4,500,000정도 합니다.

화풍은 민화풍이며 영파의 운하를 표현한것도 있습니다.

 

 

 

영파의 지도가 있다는 곳으로 이동하니 옛날 금과 은을 보관하던 창고라 하며 유구를 발굴 하여 그 터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큰 벽면에 명주성의 지도가 조각되어 있는데 성문이 6개이며 생긴 형태가 둥그스럽 합니다.

자세히 보니 성문으로 물길이 있군요.

 

성으로 통하는 길이 운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성안으로 들어 갈려면 배를 타고 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6개의 성문에 전부 물길이  표시되어있고 거미줄처럼 생긴 운하가 연결되어 있군요.

 

과연 물의 도시 답군요.

주직장의 이야기로는 불과 20년전 90년대도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현재의 도로는 전부 운하길이 랍니다.

성벽을 허물어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물길을 막아 도로를 내고 옛 고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어 졌군요.

 

다니는데 힘들고 추워서 커피를 한잔 하자고 하니 KFC에 왔습니다.

미안하여 내가 산다고 하니 서아근씨가 무슨소리 하느냐? 내가 내겠다 합니다.

중국 사람들 손님대접은 확실히 하는것 같군요.

 

차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요.

서울까지 걸었던 이야기며 블로그 이야기 코발트빛 푸른바다 이야기 등등...

본인도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영파 박물관을 권하여 가기로 합니다.

[좌로부터 서아근(주해봉 여친),김용재,주해봉(직장), 박용해(통역)]

 

2013.1.6 영파 월호공원에서 백세청풍 김용재